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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Jul 15. 2022

통증 나라에 사는 현지인과 이방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제가 츠네오와 사랑에 빠진다. 츠네오를 사랑했던 전 여자친구는 질투심에 조제를 찾아가 말한다.

"츠네오는 너를 혼자 둘 수 없다고, 지켜줄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말하는데 웃기더라? 솔직히 네 무기가 부럽다"

이에 조제는 대답한다.

"그게 부러우면 너도 다리를 잘라" 

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부러워하는 목적만 툭 떼놓고 맥락 없이 생각하는 단순함과 장애를 무기라 이야기하는 무례함. 이것이 아픔을 온전히 겪어 내는 당사자와 아픔과 멀리 떨어진 타인의 차이다. 


퇴행성 허리디스크 증상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찍은 엑스레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당시 나이 22살. 내 주변은 너무 신기해했다. 허리디스크는 나이 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질병이라고 생각해서다. '20대'와 '퇴행'이라는 조화까지 더해지니 말장난 치기 부족함이 없는 조건이었다. 20대에 기함과 장난감 역할이었던 허리디스크는 30대가 되어 무심함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고질병 중에 하나인 ‘허리디스크’는 하도 많이 듣는 말이어서 그러려니 하는 병쯤으로 인식된다. 허리가 파서 휴직하는 나에게 "휴직해서 부럽다"라고 말할 때 어떻게 반해야 할까. 휴직 안 해도 건강한 사람이 난 더 부러운데. "나도 휴직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허리를 부숴"라고 조제처럼 말해야 할까. (실제로는 혹시 너도 어디 아픈 곳 있냐고 물어봤다. 다행히 없었다.)


하지만 수영장은 다른 세상이었다. 수영장은 아픈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매일 운동하러 오시는 할머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허리 때문에 고생을 하신 분들이었다. 내가 두 달 정도 꾸준히 나오니 말을 거셨할머니 대략 7년 정도가 지나니 괜찮아지더라고 말씀하셨다. '7년'이라는 긴 시간보다 '괜찮아진다'라는 말에 희망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내 나이는 할머니에게 아프기에 안쓰러운 나이였나보다. 나만 보면 "오늘은 괜찮냐"고 물어봤고 "어제랑 비슷해요"라고 말하면 "젊은데 너무 아깝다"는 식의 무력한 대화가 반복되었다. 특히 치료에 관련한 대화는 어긋났다. 서로의 통증 양상이 다양해서다. 어떤 사람은 허리만 아프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허리는 괜찮은데 다리가 찌릿거리는 것만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앉는 게 힘든데, 어떤 사람은 앉을 때는 멀쩡한데 걸을 때 힘들다고 했다.


허리가 아픈 나도 다른 아픔에 무지했다. 한 축구선수에게 그라운드를 뛸 때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묻자 '내성발톱을 가져서 뛰는 게 쉽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 고통이 상상되지 않아서 그저 '힘든가 보구나' 생각하는 찰나, “그거 진짜 고통스러운데”라는 동료 축구선수의 말이 귓가에 꽂혔다. 그 축구선수도 내성발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허리디스크를 앓고 느꼈던 타인의 반응과 내성발톱이란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나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졌다. 수영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그려졌다.

백내장 수술을 하신 할머니가 있었다. 비가 대차게 내렸던 날에 안 오셔서 '날씨가 궂어서 안 오시나 보다'했는데, 다음 날 여쭤보니 비가 내리면 '앞을 잘 안 보여서' 미끄러질까 봐 못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수영을 안 하시고 레인에 서 계셔서 "오늘 좀 힘드세요?"라고 물으니 '어두워서' 수영을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지상 8층에 있는 수영장이라 햇빛이 잘 들어서 여름이면 불을 늦게 켜는데, 할머니는 그러면 물 속이 보이지 않아서 수영을 못하셨던 거였다. 할머니가 얘기를 해주시기 전까지 눈이 안 보이는 불편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다. '내 고통은 책 한 권인데 타인의 고통은 트위터 140자이었구나.' 싶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마치 추간판 장애를 앓는 사람이 스페인에 살고 백내장을 앓는 사람은 가나에 사것과 같다. 내성발톱은 인도일까. 그러니 아프지 않은 사람은 다른 세상이 어떤지 잘 알 수 없다. 아프면 일상이 빗나가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같은 수영장에 있어도 병(病)마다 다른 환경으로 수영을 한다. 고작 '2시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일주일' 내내 앞으로 해야 할 집안일을 미리 해놓고 최소한의 활동을 하며 몸을 준비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수영하는 모습, 만나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이방인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서 공들이는지, 시간을 조각 모음 하려고 용쓰는지를.


아픔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무차별 상처 폭격을 받으면서도 고백했던 이유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을 수는 없었다. 날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외로워졌다. 마음이 찌그러지고 비틀어졌다. 을 다물고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 대신 작가들이 그린 주인공과 말없는 대화를 나눴다. 책 옆에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책을 쌓고, 위로를 쌓았다. 스스로 위로하는 것, 그것만이 상처받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픈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자신의 병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혼자인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타인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통증 나라에서 사는 사람과 건강한 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이미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니까. 고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삶을 바꿔놓는다, 아니, 고장 낸다. 병(病)의 굴레도 받아들이 힘겨운 사람에게 심한 ‘말’ 휘둘러 사람을 쓰러뜨리곤 한다. 처음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이윽고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상황에 대한 무력함에 짓눌려진다. 나부터라도 고통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려 한다. 타인의 고통을 알기에 한계가 존재하지만, 자세히 그려보려고, 써보려고, 거기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겠다. 실패할지도 모다. 그래도 여전히 곁에 있고 싶다. 상냥한 이방인이 되고 싶다. 시도하고 싶다. 140자 트위터가 아니라 책 한 권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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