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몬스 Jul 29. 2022

누워서 보는 '캐스트 어웨이' (2)



1-10. 누워서 보는 '캐스트 어웨이' (1)에 이어서 씁니다.




#4. PLAY

불길을 만들어 구조요청을 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곧 동굴로 이사한다. 동굴 벽에 현실적으로 자신을 찾으려면 얼마나 수색을 해야 하는지 끄적여본다. 계산해보니 50만 마일(804,672km). 텍사스 땅의 2배다. 자신을 못 찾을 것이라고 체념한다. 그것보다 앞에 닥친 문제가 있다. 치아가 속을 썩인다. 처음에는 씹을 때만 아프던 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고통스럽다. 일하느라 치과를 가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된다. 피 묻은 손자국이 새겨진 배구공에불행 중 다행인 건 씹을 음식이 없는 것이라며 농담을 던진다. 배구공에게 자신의 의사가 돼 달라며 “닥터 윌슨”이라고 부른다. 내내 그의 옆에 자리하며 그의 말을 들어주는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섬, 무인도에 있지만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겼다. 살아있지 않지만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로 윌슨이었다.


PAUSE

대실패였다. 수술을 했지만 오히려 다리 쪽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앉기는커녕 서있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고 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프다. 사는 게 고통이라더니 숨만 쉬고 있는데 고통스러웠다. 살아있는 것이 저주였다. 희망과 체념을 804,672번 반복한다. 아무래도 이 통증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다는 계산이 선다. 그보다 앞에 닥친 문제가 있다. 돈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넘게 돈을 벌지 않았고 물리치료비에 수술비까지 쓰다 보니 텅장이 되었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원룸 감옥생활을 연명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다니. 허리가 아파서 서있지 못해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돈을 아낄 수 있고 평생 시도해볼 생각도 안 한 다이어트 성공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일석이조이지 않냐고 농담이라도 해야겠다. 오늘도 혼잣말이 늘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미물과 교감했다. 바닥, 매미, 집게, 초콜릿 등 나에게 563개의 윌슨이 존재하는 듯했다.



#5. PLAY

4년 후

여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작살을 던져 잡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비가 오면 동굴에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누워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디를 향하는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에서 누워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난다. 그르르르릉. 윌슨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이야기해보지만 소리의 근원은 바다 쪽인 것 같다. 그르르르릉.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 나타날까 바위에 숨어 미어캣처럼 소리의 정체를 파악한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뉴욕에서 떠내려온 알루미늄 창고 벽면다. 삐걱댄다. 뉴욕이라고 새겨진 글자를 손으로 문질러본다. 문득 2면으로 된 알루미늄 벽을 돛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지긋지긋한 무인도의 문을 넘어 뉴욕이 있는 미국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실행에 들어간다. 섬에 있는 나무껍질을 이용해 끈을 만든다. 예전에 뜯었던 택배 속 비디오테이프도 이용한다. 나무를 모두 모았지만 여전히 끈이 부족하다. 그는 알고 있다. 어디서 그 끈을 보충해와야 하는지. 위험한 절벽 위로 올라간다. 그곳은 그가 이전에 죽고자 했던 곳이다. 분명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 모양으로 깎은 나무를 끈에 매달아 절벽에 던다. 그 행위‘이전의 나’를 죽이고 현재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끈으로 묶어 내던졌던 사람 형상의 나무를 들어 올려 목을 졸라맸던 끈을 푼다. 죽기 위해 존재했던 끈이 이제 살기 위해 필요하다. 바람의 방향을 맞추기 위해서는 시간이 없다. 탈출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지만 떠나야 한다.


PAUSE

통증알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났을 때 느껴지는 통증에 따라 오늘 하루 일과를 조정한다. 미루기의 천재가 되었다. 빨래, 설거지, 청소, 요리. 급하지 않은 일은 모두 미룬다. 날파리가 꼬여도 냄새가 나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을 오늘도  풀충전하였다. 아픈 날에는 내 안에 솟아나는 욕구를 하나하나 죽이며 누워있는다. 불행이 지금 내 일이다. 아파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나아지길 바라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욕구를 죽이다가 나를 죽일 수도 있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살아있으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이렇게 누워서 살 수 없어.



#6. PLAY

준비는 끝났다. 이제 바람이 도와줄 차례다. 섬을 떠날 준비를 한다. 4년 전, 마지막 택배는 뜯지 않았다. 날개 모양이 그려진 상자를 쓰윽 만져보고 옆에 뒀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그랬었을지도 모른다. 무인도에서 탈출해 언젠가 배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위해 마지막 택배를 남겨뒀을지도 모르겠다. ‘1500일간 버티다가 탈출한다, 멤피스의 켈리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오’라고 자신의 묘비명이 될 수 있는 글을 무인도 바위에 다. 실패할지도 모를 항해를 윌슨과 함께 시작한다. 시작은 성공적이다. 뗏목이 바다 위로 떴고 돛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무인도에서 멀어져 간다. 점.점.멀어져갈수록 무인도를 향한 이름 모를 감정이 든다. 윽하게 섬을 바라보면서 노를 젓는다.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를 넘는다. 더 큰 파도가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오지만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그를 휘감고 있었다. 아직은 아냐. 아직 아냐”를 외치며 뗏목을 꽉 잡고 버틴다. 며칠이고 노를 젓는다. 비가 올 때는 코코넛 통에 물을 담아둔다. 낮에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비가 오는 날인지 해가 뜨는 날인지 중요하지 않다. 오늘도 그저 노를 젓는 날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밤, 바람에 저항하다가 지쳐 잠에 든다. 깨어나 보니 윌슨은 바다에 둥둥 떠 멀어져 가고 있다. 그는 윌슨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윌슨은 저기 멀리 멀어져 가는데, 윌슨을 구하기에는 뗏목과 연결된 줄이 짧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 윌슨을 놓아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윌슨을 보내고 뗏목에서 목놓아 운다. 희망의 도 날아갔다. 윌슨도 없다. 뗏목도 기울어가고 있다. 노를 바다에 살포시 얹어 떠나보낸다. 처음 출발할 때와 다른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일렁이는 바다 위 뗏목에동공이 풀린 채 누워있을 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지쳐 힘없이 누워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배 소리다.


PAUSE

망설이던 시간도 끝났다. 차분하게 바깥세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할 때다.  통로로 공무원을 택했다. 허리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어버린 탓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공무원은 경력이 없어도 공부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마침 내가 누워서 할 수 있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기다. 동영상 강의를 소리로 들으면서 공부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9시 기상, 30분 공부, 1시간 휴식, 30분 공부, 1시간 휴식, 식사, 30분 휴식, 1시간 공부, 1시간 휴식, 30분 공부, 1시간 휴식, 수영장, 2시간 휴식, 식사, 30분 공부, 1시간 휴식. 이렇게 공부와 휴식을 반복하며 하루를 쓰면 3시간 정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합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내가 무엇인가 꾸준히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오늘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느라 답이 없는 미래를 걱정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동영상 강의를 리만 들으면서 개요를 파악하고 책을 한 장씩 찢어서 누워서 부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심한 통증으로 하루를 버리는 날도, 일주일을 버리는 날들도 있었다. 잠시 쉬었을 뿐 포기하진 않았다. 조금 느릴 뿐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노를 저었다. 합격운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올 때까지. 험 보기 일주일 전, 통증이 더 극심해졌다. 목, 어깨, 골반, 허리, 무릎, 발목,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아프다고 아우성이었다. 힘들다고 떼쓰는 온몸을 뿌리쳤다. 파스를 7개를 붙이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7. PLAY

“45분 뒤 도착이야”라는 말과 닥터페퍼 음료, 얼음잔이 그의 앞에 놓였다. 동료는 그에게 환영식을 마치고 그의 사랑 '켈리'를 만나라고 한다. 그는 매일 시계 속 그녀의 사진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살아 나올 수 있었다. 사진 속에 있던 그녀를 이젠 진짜 볼 수 있다. 그녀와 만나기 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변을 서성이는데 문이 열린다. 낯선 남자다. 잘못 들어온 줄 알았던 그 남자는 켈리의 남편이다. 그녀가 충격에 휩싸여 나오기가 힘들다며, 혼란스러워한다는 말을 전하고 나간다. 그는 커튼을 들어 창문 너머 차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떠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가 없는 동안 세상은 달라져있었다. 환영식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이 즐비하다. 커다란 게다리 여럿테이블에 태연히 놓여있다. 무인도에서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작살질을 해야 얻을 수 있었던 음식이다. 불은 어떤가. 라이터 원터치면 간단하게 켤 수 있다. 몇 시간 내내 땀 흘리며 나무를 비비고 비벼서 만들어야 했던 불이었는데 말이다. 자신이 살았던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다. 자신이 없던 4년 동안 세상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얼어있던 건 오직 그뿐이었다. 


PAUSE

시청 홈페이지 용공고 최종 합격자 단 속 수험번호 XXXXXX. 합격이다. 그것도 엄마의 생일날. 합격의 기쁨은 찰나였다. 난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아직 1시간도 제대로 앉아있지 못하는 몸인데 어쩌지 싶었다. 시험 당일과 면접 당일 5시간 정도의 일정을 보내고 나서 일주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내 앓아누워있었다. 주 5일 8시간 근무는 내가 감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엄두가 나지 않는 높은 벽이었다. 아무에게도 합격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곧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쁨이라는 감정이 내게로 오다가 머뭇댔다. 이내 슬픈 감정이 마음속에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임용유예를 검색했다. 좋은 조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웬 안 좋은 말 가득했다. '불이익'이라는 단어가 날 움츠러들게 했다. 임용유예는 의무사항이 아니라 인사팀의 재량사항이었다. 리가 아픈 것은 임용유예 사유로 인정해주지 않을뿐더러 임용유예를 한다고 해서 허리가 좋아질 거라 장담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직장이라는 곳은 관계를 일로 맺는 곳, 냉혹해져야 하는 곳, 아픈 게 흠이 되는 곳, 가받는 곳, 무엇보다 내가 혼자 지내던 세상과 너무 다른 곳이었다. 3일 안으로 임용 등록하라는 문자 도착했다. 낯설고 냉엄한 세계의 초대장이었다.



#8. PLAY

4년을 버틴 것도 다 켈리 덕택이었다. 그녀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비 오는 날 택시를 타고 찾아간 그녀의 집구석구석은 이미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잘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집 모퉁이에서 주인공 '척'이 무인도에서 살아있다고 믿었던 흔적이 발견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주변의 말에 그를 잊으려 노력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냈을 테다. 서로 대화는 하고 있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에 수긍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과 연락이 닿지 않은 4년은 사회에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장례식을 치르고 그를 땅속에, 마음속에 묻었을 것이다. 켈리는 둘의 추억이 담긴 자동차 키를 그에게 넘긴다. 그는 뜨거운 포옹을 마지막으로 그녀를 남겨두고 떠난다. 배고픔, 치통, 외로움, 자살 충동, 윌슨과의 이별까지 견뎌내며 가 그렇게 도달하고자 고대하던 세상의 전부였던 켈리와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안온한 그의 집 안, 무인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얼음이 든 컵을 쥔 채로 친구에게 고백한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뿐이었다'라고. 이후 무인도에서 어떻게 버텼고, 어떻게 탈출했는지, 그리고 무인도에 사는 동안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하다 문득, 앞으로 그가 해야 할 것닫는다.

"난 계속 살아갈 거야. 내일이면 태양이 다시 떠오를 테니까. 파도에 또 무엇이 실려올지 모르잖아."


PAUSE

내게 열렸던 많은 세상의 문고통으로 닫혔다. 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은 채 그저 뚜벅뚜벅 고요한 나만의 투쟁을 이어갔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걸음인지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최소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삶을 조각조각 꿰맸을 뿐이다. 지친 나를 일으켰던 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슬픔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프기 전 세상을 있는 듯 없는 듯 괄호로 묶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이윽고 내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다.

3

2

1

0

제로가 되어야 발사되는 우주선처럼. 0이 되어 다시 시작한다. 잎이 꺾인 자리에서 다시 잎을 피운다. 뿌리가 있는 한. 무것도 아닌 나에서부터 나를 다시 꼿꼿이 만들어나간다. 숨이 쉬어지는 한.



작가의 이전글 누워서 보는 '캐스트 어웨이'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