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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Jun 10. 2022

시간의 바깥

수염이 잘린 고양이처럼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경로를 이탈하여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탐색이 안돼서 무한 로딩 중이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라는 말 골목에 들어섰다. "100m 전방에서 당장 유턴하세요" 속에서 외치지만 나는 경로탐색이 안 되는 운전자였다.

평일 오후에는 젊은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뿐이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회사에 있어야 할 평일 오후 4시에 대해 생각한다. 점심 먹고 일하다 보면 허기져서 서랍에서 하리보 젤리를 꺼내던 4시. 버터와플을 꺼내던 4시. 촉촉한 초코칩을 먹으며 눈이 번쩍 뜨이던 4시를 떠올린다. 괜히 부끄럽다. 수영장 할머니들에게 귀에 피나게 들었던 이야기, '젊은 사람이 어쩌다'라는 말을 시선으로 느다. 숨고 싶다. 알록달록 색깔이 있는 옷이 부담스러워졌다. 난 쥐색이어야겠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내 젊음을 우울의 가면과 쥐색 옷과 모자로 덮어야겠다. 쥐처럼 어디로 숨어야겠다. 어여 집으로 돌아가야지. 4시, 노인이 퇴근시간을 피해 1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4시, 내가 산책하러 나오는 시간. 노인들과 같은 시간의 흐름대로 살고 있었다. 산책하면 일제히 빤히 쳐다보고 있는 노인들의 눈이 싫땅을 보고 걸었다. 젊음이 말라갔다.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 과거와 현재,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과거의 활발했던 나의 모습을 나로 생각하는 현재의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일주일을 전공 18학점, 대외활동 3개, 봉사활동 8시간의 고정 스케줄로도 모자라 매주 수요일마다 독서모임을 가졌다. 깨어있는 동안 빈 시간이 있는 걸 참지 못했고, 스케줄 블록을 테트리스 채우듯 채우는 것도 모자라 잠을 줄이며 삶을 불살랐지만 '나'라는 운명의 실 꽁꽁 묶여 결국 실패가 되고 재로 남았다. 후회하기 싫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면 후회하지 말자며 혹독하게 자신을 다그쳤던 대가가 실패였다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예고 없이 과거의 나와 결별해야 했다. 자아실현을 하며 돈을 버는 직장인이라는 껍데기,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딸이라는 껍데기, 정성스럽게 고민상담을 해주는 친구라는 껍데기, 친절한 이웃, 상냥한 손님 등등등. 껍데기야, 가지 마,라고 하고 싶었지만, 병의 아픔이 지속될수록 껍데기가 하나씩 치워졌다. 어엿한 장벽이 되었던 껍데기를 벗자 조갯살 같은 나의 속살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잠든 새벽 4시, 혼자 있으면서 옆집에 혹시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놀랄까 소리 죽여 울던 인간종(種). 태양성의 행성 지구라는 천체의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코딱지만 한 대한민국에서도 기껏해야 6평 남짓한 공간을 빌려 쓰는 호모 사피엔스 종족에 불과했다. 눈과 콧날 사이에 고인 눈물과 피부에서 귓가로 흐르는 눈물자국, 어깨의 들썩임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받아냈다. 눈물의 맛은 짭짤했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수영장 할머니가 소개해준 통증 방어용 바르는 파스, 멘소래담의 냄새였다. 붙이는 파스보다 냄새가 강하다. 혼자 있을 때는 괜찮은데 같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수군댔다. 어디서 파스 냄새가 너무 난다고. 결국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쓰지 않고 붙이는 파스로 대신했다. 그래도 은근한 파스 냄새가 떠나지 않는 것 같았다. 몸에서 파스 냄새를 박박 씻고 싶었다. 내 아픈 냄새를 들킬까 향수를 사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사람들을 피했다. 방 안에서 혼자 실컷 아파하고 싶었다. 파스 냄새를 맡게 하기 싫었고 아파서 찡그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튀고 싶지 않았다. 향수를 뿌리고 쥐색 옷을 입었다. 그것이 나의 방어막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눈치채지 못했다. 벤치에 누워있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내버려 뒀다. 사람들 사이에서 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튈 수밖에 없다면, 아픈 사람보다 특이한 사람을 택했다. 집으로 가서는 이 모든 것을 벌거벗기고 혼자 맘껏 아파했다. 다리에 소래담을 바르고 허리에 찜질기를 두고 가면을 내려놓았다. 찜질을 뜨겁게 해서 허리에 화상을 입었 열 알레르기가 생겼지만 허리 통증보다 뜨거운 통증이 더 나았다. 다리에 느껴지는 방사통보다 피부가 벗겨져 딱지가 생기고 파스 알레르기가 생겨도 소래담을 쓰는 게 나았다. 감추고 위장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흰웃음을 지었다. 내 방에 누군가 들어오며 속삭이는 것 같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 외로움의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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