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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Jun 17. 2022

사소한 것들의 구원


하늘은 어떻게 해서든 괴롭히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은 이겨낼 수 있는 고통만 준다고 하더니 이겨내면 이겨낼수록 더 큰 고통을 주며 나를 시험했다. 일상을 생략해버려야 할 때가 많아졌다.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 같은 집안일은 물론이고, 물 마시기, 식사, 수면, 화장실 같은 기본적인 것까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면 교회를 나가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교회까지 갈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조금은 나아진 거예요. 힘들어서 못 가요."라고 절히 거절했지만 게는 이미 숨겨진 구원자가 있었다. 슬픔을 여행하며 찾은 나만의 오아시스자 윌슨이었다.



#만능집게 #죽어도못보내  

허리를 굽힐 수 없었던 내가 땅바닥에서 무얼 주울 때마다 사용했던 도구. 원시인이 불을 발견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허리디스크 인류가 존재한다면 동굴 속 벽화로 남겨줘야 할 것 같다. 할머니에게 지팡이가 있다면 나에겐 만능집게가 있다! 허리가 아프기 전에는 깊이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은 건은 땅바닥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위로 올라오는 물체는 없었다. 물건을 다 허리 높이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것들은 왜 이렇게 장판에 붙어있는 건지. 장판과 사랑에 빠진 건지, 서로 더 가까이 끌어안고 뽀뽀하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는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님처럼 그들을 만능집게로 장판과 떼어놓아야 했다. 뭐든 아래에 위치하는 것, 가령 내 발 같은 것이 날 곤란하게 했는데, 발을 닦을 때에도 수건을 아래에 던져놓고 닦다가 만능집게로 들어 올려 세탁기에 넣었다. 세탁이 완료된 빨랫감만능집게로 들어 올려 널었고, 말린 옷을 만능집게 이용해 입었다. 양말도 만능집게로 신었고, 신발도 만능집게로 정리했다. 만능집게는 나의 허리 그 자체였으며, 무릎 아래 구역의 김두한이었다.


#페레로로쉐 #초콜릿 #역시인생은단거(danger)

수술 후 3개월 동안 일어나지 못해서 밥을 잘 못 먹었다. 앉거나 서있을 힘이 부족해 누워서 밥을 먹었는데 자꾸 체했다. 라지 피자 한판도 거뜬했던 나였지만 저절로 양이 줄었다. 평생 해보지 않은 다이어트를 이때 했다. 제 다이어트로 8kg이 빠졌다. 힘이 없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라면 주저 않고 배부른 돼지를 외치던,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했던 나는 삶의 낙을 잃었다. 하루에 한잔씩 꼭 마시던 커피도 끊었다. 마약성 진통제와 커피를 함께 마실수는 없었다. 전혀 움직일 수 없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적었고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기에 카페인은 금해야 했다. 이때 나타나 구원해준 건 집에 굴러다니던 페레로로쉐 초콜릿이었다. 먹는 순간, 운명이란 게 이런 걸까 싶었다. 눈이 떠지고 눈동자가 커지고 기분이 살랑살랑거렸다. 이거다! 나의 사랑! 내 슈퍼히어로! 초콜릿도 카페인이 있다고 들어서 하루에 3개로 제한했지만, 개미 밥만큼 먹고 나서 후식으로 먹었던 초콜릿 아파서 먹는 게 귀찮았던 나에게 삼이었다. 찰나 왠지 모르게 으라차차 기운이 샘솟았고, 아직 나에게도 솟아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가 좋아졌다. 편의점 앞에 휘황찬란하게 진열된 황금색 페레로로쉐 초콜릿을 보며 울던 때가 떠올라 미소를 짓는다. 슬픔을 아는 기쁨의 맛을 페레로쉐 초콜릿 선물해줬으니까.


#팟캐스트 #내고막남친여친

선을 아래로 두려고 고개 숙여도, TV를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미세 조정해도, 허리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아프니까 하지 말라고 구조 신호를 보냈다. 누워 있어도 척추가 위아래로 들썩들썩거렸다. 띠-띠띡- 모스부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 .- ...- . -- . .... . .-.. .--. -- .

(도와줘. 살려줘.)

허리가 아프니 눈을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보는 게 불가능 하루 종일 할 게 정말 없었다. 잠을 못 잤고 걱정으로 잡생각 많았다. 마음의 소리는 안으로, 더 깊이, 더 어두운 곳으로만 향했다. 외부 소리로 집안을 채워야 했다. 안 그랬다간 내 머릿속 걱정 소리가 내 머리를 터뜨릴 수도 있었으니까. 눈 대신 귀가 열일했다. 보지 않아도 재미있는 건 팟빵만 한 게 없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말도 없이 내내 듣기만 했다. 이동진이 소리꾼이고, 김중혁은 고수, 김영하가 만담꾼이며, 김숙은 어릿광대, 최욱은 깍두기였다. 청중으로서 이곳저곳 구경하며 고 습한 곳에서 나를 끄집어냈다. 


#수영장 #처음으로느낀자유 #꿀잠보장

수영장에 가는 건 어떻게든 나아보려는 의지였다. 매일 무엇인가를 하려는 혹은 한다는 자체가 날 뿌듯하게 했고, 물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장에 가서 샤워만 하고 와도 예전보다 동요 없이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가끔 큰 수영장에 혼자 있을 때가 있다. 그럼 구석으로 가 몸에 힘을 쭈욱 빼고 죽은 사람처럼 수영장 물 위에 둥둥 떠있어 본다. 말 그대로 물아일체다.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나와 물만을 생각한다. 자유다. 이렇게 온전히 나만 생각해본 적이 처음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 운동이란 건 아무 생각하지 않고 내 몸에온정신을 쏟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로 수영장이 더 좋아졌다. 처음으로 물 위에 섬처럼 떠있었을 때 느꼈던 감정을 꺼내보곤 한다. 지금은 아픈 시간이지만 훗날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아브라카다브라. 오늘도 주문을 건다.



내가 겪은 아픔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고, 상처를 치유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고, 내 모든 에너지를 그곳에 썼지만, 압도적인 고통에 주저앉아버릴 때가 많았다. 아픔과 손을 맞잡고 망설이면서도 한 발자국씩 내딛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내게 남겨진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빈틈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빛을 따라갔다. 내가 아픈 그 자리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야 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걸까. 어차피 내 몸인데. 무엇을 감추려고 했던 걸까. 리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고 중력과 원심력에 몸이 이끌리는 대로, 좌우로, 위아래로, 부웅 - 그런 날도 있다며 고개를 수그리며 다시 일어났다. 잠을 어떻게 해서든 자려고 했고, 적당한 음식을 먹으려 했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이 진부한 행위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부지런을 떨었다. 그전까지 몸에게 행했던 버릇없음을 반성하고 몸에 예(禮)를 지키며 하루마다 소소한 의식을 치렀다. 인간의 '하루'는 먹고 자는 것을 반복하며 인생의 굴레에 갇히는 거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먹는 걸 줄이거나 잠을 줄이는 쉬운 선택을 했다. 그게 그렇게 소중한 의식인지 알지 못했다.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고 그랬다. 맨소래담을 바르고 페로로로쉐를 먹고 팟빵을 들으며 수영장에 가고 만능집게로 허리를 보호했다.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시시한 일상을 다시 찾기 위해 소소한 구원자들을 모아다. 그렇게 내 몸과 천천히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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