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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May 27. 2022

혼자 하는 걸음마

걷는 법을 잊어버린 송아지

우주는 까맣다. 바닷속도 까맣다. 빛이 없으면 다 까맣다. 파란 낮의 하늘보다 까만 밤의 하늘이 진짜 하늘의 모습과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원래 물체의 본모습이고, 그래서 내가 슬픈 게 정상이고, 아픈 게 정상이고, 힘든 게 정상이고, 어둠에서 생활하는 게 다 정상이라고, 밤하늘을 보며 생각한다. 파도는 파도, 바다는 바다, 허리는 허리, 나는 나라고 중얼거린다. 초의 나도 어둠이었을 테지. 어둠이 짙은 엄마의 뱃속에서 장막을 찢고 터져 나온 아이는 어떻게 걷게 되었을까. 걸음을 익히기 전 바닥을 기고, 벽을 잡고, 두흔들흔들거리다, 겨우 한 발짝씩 땅에서 발을 떼는 순간을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엄마는 기억할 테지. 걷는 법을 잊어버린 나를 보면 엄마는 무슨 생각이 들까.


간단한 줄만 알았던 수술의 후유증은 간단하지 않았다. 더 이상 땅에 딛고 설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크게 동요했다. 경과를 기다려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낫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수술하면 괜찮아진다며, 왜 나는 안 좋아지지, 의사좋아졌다고 하는데, 난 왜 그 말에 화가 나지.' 혼란스러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하지 않다. 머리를 통째로 얼음물에 담가 머릿속을 냉동시키고 싶었다. 닿으면 바스러질 것처럼 내 마음은 쿠크다스가 되었고, 기분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날뛰었다.


냉동 볶음밥 도시락 1개로 하루를 났다. 진통제를 먹기 위해 먹는 최소한의  밥이었다. 한술도 뜨고 싶지 않지만 그전에 위염으로 고생했던 경험을 다시 반복하는 게 더 싫어 누워서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티도, 바지도, 멀쩡한 모습으로 입을 수 없었다. 바닥에서 발을 1cm 떼었다가 놓는 행위도 어려운 나에게 옷을 입는 건 발을 멀치감치 떼내야 하는 동작과 허리는 숙이는 동작이 동시에 수반되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니까. 바닥에 누워 만능 집게로 팬티를 주워 팔이 닿는 곳까지 들어 올려 입었다. 그것마저 힘든 날엔 초의 이브처럼 지내야 했다. 집안일은 뒷전이었다. 어질러진 방에서 진통제를 먹어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아지랑이처럼 있는데 없는 것처럼 지냈다. 입술도 옴싹달싹하기 싫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목련이 맺혔다. 우울의 틈 사이로도 봄은 번졌다. 하루 종일 누워 눈을 깜박거리며 침대에서 에너지를 모아 을 딛고 서는데 세 달이 걸렸다. 침대에서 화장실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 밥, 눕기, 진통제, (병원), 눕기, 밥, 진통제, 눕기, 서기, 눕기, 밥, 진통제, 눕기, 서기, 눕기, 눕기, 눕기....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수행이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내게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몸이 말하는데 뭐라도 좀 하라고 마음은 아우성쳤다. 누워 있는 몸과 부유하는 정신. 이런 게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통증에 대한 물음표와 느낌표만으로 살 수만은 없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라고 쉼표를 찍고 마침표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집 안에서 창 밖을 갈망했다. 누워있 '오늘은 몇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마음속으로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나를 그려봤다.  밖에까지 나갔다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다시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다. 오늘은 오른쪽 골반, 오늘은 왼쪽 골반, 오늘은 왼다리, 오른 다리, 왼쪽 엄지발가락. 하루하루 아픈 곳은 달랐지만 걷고자 하는 열망은 매일 같았다.

98걸음

89걸

103걸음

91걸음

75걸음

56걸음

116걸음

.... 

조금씩 걸음 수가 늘었다. 집 앞 200m 골목길을 오늘은 슈퍼까지, 오늘은 교회까지, 오늘은 미용실까지, 오늘은 왕복 1번, 오늘은 왕복 2번. 운동이랄 것 없는 운동의 수준을 천천히 올려갔고 작은 성공을 쌓아가며 좁디좁고 가깝고도 먼 거리를 오고 갔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집 앞 골목길이 가뿐해져서 큰길로 나섰다. 마찬가지로 차근차근 단계를 높여갔다. '다음은 교육청까지, 다음은 파리바게뜨까지, 다음은 경전철 역까지, 다음은 경전철 1 정거장 타고 와야지' 목표를 세우며 조금씩 걸어 다니는 반경을 넓혀갔다. 한번 달성한 결실이 쉽게 깨어지던 날도 있었다. 경전철을 타러 갈 수 있다고 좋아했더니 다음 날에는 한 발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다. 한 단계 나아가기는 어려웠지만 언제고 다시 단계 전, 여덟 단계 전으로 돌아가곤 했다. 언제 리셋 버튼을 누를지 모르는 허리를 달래 가며 집에서 2.6km 떨어진 수영장에 경전철 타고 갈 수 있는 몸을 만드는데 5개월이 걸렸다.


8월 16일, 드디어 물속에서 걷는 연습을 하기 위해 자유수영 1달권을 끊었다. 광복절에 우리나라가 빛을 되찾았듯, 그즈음에 나도 수영장에 도달했으니, 어둠에서 빛으로 한 발자국 다가간 거라고 뇌에서 기쁨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허리도 곧 광복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다시 희망을 가져봤다. 수영장 도착은 타임라인상 3.1. 운동에 불과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긍정하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굳은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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