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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막귀란 무엇인가?

나의 감상 철학 에세이

by Kurt

나는 예술 감상은 훈련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많이 들어야 한다. 고등학교 때 막연하게 음악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싫어하는 음악도 이해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다. 취향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알고 들어야 평론가로서 논리적인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로 K-POP을 듣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Immortal Technique, Tonedeff, Jedi Mind Tricks 같은 언더그라운드 힙합만 들었고 그런 음악이야말로 ‘진짜 예술’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그런데 빅뱅, 비스트, 포미닛,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으면서 음악의 완성도와 사운드 퀄리티가 의외로 높다는 사실이 보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아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그 대화의 밑바탕에는 "상업적인 건 구리고 예술성이 없다"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Justin Bieber가 데뷔했을 때 음악을 하던 친구들은 당연히 비웃었고 나 역시 그 문화 속에서 상업음악은 가볍고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음악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들었던 K-POP 같은 상업음반들에 완전히 매료됐다. 내가 듣던 음악은 세상의 극히 일부였고, 편견을 가지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래서 여러 장르와 씬의 음악들을 파기 시작했다. 다양한 음악을 듣다 보니 각 씬에서의 사운드 지향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만의 인사이트가 생겼다.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을 이때 체감했다.


가장 큰 전환점은 빅뱅이었다. “This Love”가 마룬파이브 노래의 통샘플이라며 친구들이 비아냥대던 시절, 나는 오히려 지드래곤이 원곡의 멜로디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모방이나 표절로 내려치기에는 아예 다른 곡을 탄생시켰고 더 캐치하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그리고 “Love Song”, “Fantastic Baby”, “Last Dance” 등 이후의 빅뱅 음악들은 K-POP이 아티스트로서 예술성과 진정성 있는 음악을 할 수 있는 씬이라는 걸 ‘증명한 팀’이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트렌드를 완벽히 읽고, 새로운 사운드의 표준을 만들어냈다. 그 흐름을 보며 내가 알고 있던 음악의 범위가 얼마나 좁았는지를 실감했다.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으로서의 내 태도도 다시 보게 됐고, 그 과정에서 확고한 나만의 막귀에 대한 정의가 생겼다.


평론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막귀는 귀가 막힌 것이 아니라 경험의 장이 좁을 뿐이라는 것이다. 보이고 들리는 만큼이 예술이고 예술은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 확장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음악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음악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자신의 느낌대로 말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순수한 피드백일 때가 많다. 그것이 진짜 ‘순수한 감상’이다. 나는 그런 순수한 막귀가 가장 정확한 리스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취향 차이’라는 말은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건 두 가지 경우에만 진리로 작동한다.


첫째는 음악적 지식이 전혀 없는 순수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음악을 느끼는 사람,


둘째는 수많은 음악을 듣고 지식을 쌓아 다양한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일 때다.


그 두 부류만이 ‘취향 차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반대로 애매한 지식을 가진 리스너들이 가장 부정확한 평론을 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애매한 지식이 편견으로 작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이 정말 음악에 대해 평론을 하고 싶다면 스스로 진심으로 다양한 음악을 존중하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편견 없이 음악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평론할 것이 아니라면 억지로 많이 들을 필요는 없지만 음악에 대해 평론을 한다는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편견이 배제된 글이 가장 객관적일 수 있다고 느낀다. 음악을 많이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음악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음악을 넓게 듣는다는 건 타 장르의 문법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성시경이 본인 유튜브에서 슈퍼주니어 규현한테 일본 팬들에게 진심으로 그 감사함을 전하고 존중하고 싶으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란 말이 떠오른다. 음악도 비슷한 거 같다. 그 문법과 언어를 이해하려는 태도, 그 과정에서 스스로 편견을 깨는 경험이 쌓일수록 비로소 더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막귀’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막귀들은 막혀 있는 건 귀가 아니라 태도인 경우다. 결국 모든 예술 감상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의 훈련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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