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은 정말 ‘K’를 떼야 할까

K-POP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과 대안

by K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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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SEYE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팀을 K-POP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반사적인 인식에 가까웠다.


① 전곡 영어 가사

② 미국을 중심으로 한 활동

③ 다국적·다인종 구성


이 조건들을 놓고 보면 KATSEYE는 K-POP이라기보다,

K-POP 시스템을 활용해 만들어진 글로벌 팝 걸그룹에 가깝다.


물론 이들은 한국식 연습생 시스템을 거쳤고, K-POP 산업이 축적해온 트레이닝 방식과 팬 소통 구조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이들을 K-POP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약 피프스 하모니가 같은 방식으로 트레이닝을 받았고, 한국인 멤버가 한 명 포함돼 있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K-POP이라 불렀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질문은 특정 그룹의 정체성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K-POP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묻는 질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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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시혁은 “K-POP이 더 성장하려면 K를 떼야 한다”고 말한다.


글로벌 시장 확장이라는 문제의식 자체에는 지극히 공감한다.

실제로 2023년 이후 K-POP의 앨범 판매량은 감소세에 접어들었고,

현지 라디오 출연이나 멤버들의 영어 소통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확장 전략은 분명 필요한 선택이다.


다만 그 해법이 반드시 ‘K를 내려놓는 것’이어야 하는지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K-POP의 위기는 K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언어나 국적이 아니라, 성과에 집착하며 선택해온 방향성에 있다.


빌보드를 기준으로 맞춰진 사운드, 팬서비스에만 초점이 맞춰진 음악 활동,

실패를 회피하는 전략들이 쌓이면서 K-POP 음악은

어느 순간 국내에서 남녀노소가 함께 소비하는 대중음악의 위치를 잃어갔다.


K-POP이 종합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라고 해도, 팬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중심에는 결국 음악이 있다. 이제는 잘 기획하고 세련되게 포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돌 스스로가 그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언어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셀프 프로듀싱과 DIY 감각을 전면에 내세운

최근의 코르티스(CORTIS) 같은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글로벌 확장을 이유로 K-POP의 정체성을 내려놓는 선택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짚지 못한 해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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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그래미 어워즈 후보 선정 발표는 K-POP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로제의 ‘APT.’와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 ‘Golden’이 본상 후보에 오른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사건이다. 다만 이 곡들의 공통점 역시 분명하다. 영어 가사, 미국식 팝 작법, 그리고 미국 팝 시장이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라는 점이다.


이 장면은 그래미가 K-POP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기보다,

그래미가 받아들일 수 있는 K-POP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 사례에 가깝다.


같은 맥락에서 KATSEYE의 그래미 후보 지명 역시 K-POP 현지화의 성공이라기보다는,

글로벌 팝 시장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결과에 가깝다.


이 성과를 곧바로 K-POP의 확장으로 포장하는 순간,

K-POP이 축적해온 문화적 정체성과 유산은 다시 ‘방법론’으로 축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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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K’의 기준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에게 K-POP의 최소한의 기준은 거창하지 않다.

가사가 전부 한국어일 필요는 없지만,

단 한 구절이라도 한국어가 쓰인다면 나는 그 음악을 K-POP으로 느낀다.


영어로 쓰인 팝 위에 한국어 문장이 얹히는 순간, 음악의 결은 분명히 달라진다.

언어는 소리이기 이전에, 그 언어를 사용해온 문화와 가치, 사고방식이 함께 담기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어가 들어간 순간, 그 음악에는 ‘K’의 정서와 정신이 깃든다.


‘Golden’을 들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도 비슷했다.

이 곡은 대부분 영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품의 설정과 맥락 속에는 이방인으로 살아온 이민자와 유학생들의 감정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미국식 팝처럼 들리면서도, 분명히 K-POP의 감정 결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K-POP의 ‘K’를 국적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정서와 정신에서 찾고 싶다. 내가 K-POP의 잠재성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역시 음악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다.


K-POP은 음악을 매개로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관계성을 중심 가치로 삼아왔다.

이 관계성이 축적될수록 몰입은 깊어지고, 팬은 음악을 넘어 하나의 경험과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퍼포먼스, 세계관, 팬덤, 윤리적 메시지가 결합된 이 구조는
지금의 Z세대와 알파세대에게 중요한 정서적 기반이 되는 콘텐츠로 사랑 받고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K-POP의 다음 단계는 K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K 안에서 더 멀리 가는 것이다.

더 다양한 사운드를 받아들이고, 더 많은 문화권의 감정 구조를 K-POP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


그 과정은 K-POP을 팝의 하위 장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문법 자체에 영향을 주는 방향이어야 한다.


KATSEYE의 그래미 노미네이트는 분명 축하할 만한 성과이며,

K-POP 현지화 전략의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다만 이 성과를 곧바로 ‘K-POP 현지화의 성공’으로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말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K-POP은 K를 떼야 살아남을까. 아니면 우리는 아직, K 안에서 충분히 멀리 가보지 않았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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