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2살 때 에미넴을 만나면서 힙합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이 생각보다 질겨져 믹스테입까지 만들어봤을 정도로 힙합에 심취했었다. 그만큼 힙합은 내가 음악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깊게 연구했던 장르다. Pusha T의 "MY GOD"를 카피하면서 랩 기본기를 다졌고, Rap Genius를 활용해 힙합적인 가사를 이해하고 수많은 구글링으로 그 문화를 흡수하려 했다. Tiger JK가 "힙합은 음악이 아니라 Lifestyle"이라고 했던가. 내가 내린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힙합은 "정신"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내가 뭐라고 힙합의 사전적 의미를 정의할 수 있겠냐만, 나는 이 정신을 "능동적인 정신과 의지"로 웬만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셀프메이드의 자수성가와 자랑질, 자신의 이웃을 계몽하려던 의지, 파티하며 즐기는 바이브와 긍정적인 에너지 전파, 그리고 표현의 자유까지. 이런 것들이 모두 능동적인 정신과 애티튜드를 담고 있다면, 그건 힙합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힙합에서 파생된 장르가 많지만, 내가 랩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힙합이라는 틀에 갇혔던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강했다. 랩을 잘해야 하고, 비트는 샘플링 기반의 붐뱁이나 서던 힙합에서 주류화된 트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래퍼 지망생들이 할 수 있는 장르적 선택지가 제한적이었고, 랩이 경쟁력의 전부였던 시기였다. 심지어 다량의 곡을 담은 믹스테잎을 쏟아내며 작업량으로 승부를 보던 2010년대 초반부터 2015년까지는 그런 흐름이 대세였다. (Gucci Mane, 초기 Lil Wayne 등)
그러나 이제는 싱랩, 오토튠 같은 것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얼마나 큰 반발을 샀을지 난 그 시기를 경험해봤으니 이해한다. 당시 힙합의 기준은 Nas, Jay-Z, Snoop Dogg, Dr. Dre, Eminem 같은 Real OG들이었고, 이런 씬에서 T-Pain, Future, Drake가 성공했을 때 기존 힙합팬들의 반발심은 상당히 거셌다. Jay-Z가 "D.O.A" (Death of Autotune)이라는 곡을 발표하며 OG로서 힙합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힙합은 점점 더 대중적으로 확장되었고, 지금은 K-POP에서도 808 드럼 없이 곡을 듣는 게 어려울 정도로 힙합 요소가 스며들었다. 나는 OG들이 세운 기준으로 힙합의 정체성을 고수하기보다는, 내가 말했던 "능동적인 정신과 의지"가 힙합의 가치와 메시지를 더 정확히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Aqua의 Cartoon Heroes에 랩이 들어갔다고 해서 힙합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랩은 랩이고, 힙합은 힙합이다. 오히려 이렇게 구분짓는 것은 전혀 애매하지 않다. 계속 강조하지만 힙합은 음악 장르가 아니라 정신과 애티튜드에 더 가깝다.
조금 더 찐 바이브로 얘기하자면, Big Naughty와 비오가 힙합인가? 난 힙합이라고 생각한다. 힙합의 원래 정의에 딱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힙합이 가진 '능동적인 정신'과 실험적 태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는 기존 틀을 넘어 새로운 서브 장르를 만들어내는 힙합의 본질과 연결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힙합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다 잘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다만, 래퍼 지망생이나 힙합 음악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힙합"이라는 프레임에 창의성을 갇히게 두는 음악들을 보면 아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힙합의 이미지와 틀 속에서 음악의 목적과 목표가 보이지 않는 창작물들이 너무 많다.
이제는 "힙합 음악"이라는 틀 안에 갇혀 노력과 단련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고 싶다. 드릴, 레이지, 뉴재즈처럼 힙합의 파생 장르들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지금, 아티스트들이 기존의 힙합 요소를 답습하고 힙합이란 프레임 안에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만의 목표와 메시지를 음악으로 더 자유롭게 풀어내길 바란다. 그렇게 할 때, 힙합은 단순히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넘어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다.
Trap 장르에 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심으로 구현하고 있는 아티스트를 추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