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리뷰] KiiiKiii - 《Delulu Pack》
키키의 데뷔 앨범 《UNCUT GEM》을 들었을 때의 감상은 다소 묘했다. 원석 같은 날것의 느낌과 과감한 시도는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날것’조차 기획자가 인위적으로 설계해낸 느낌이라 다소 과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멤버들의 매력보다 이런 판을 짠 스타쉽 프로덕션팀의 노고에 더 큰 박수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이후의 행보도 비슷했다. 키키의 음악을 꾸준히 모니터링했던 건 멤버들의 색깔이 궁금해서라기보다, ‘스타쉽이 이번엔 또 어떤 실험을 했을까’ 하는 프로덕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중간에 불거진 멤버의 이미지 논란 역시 나에게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결국 대중 앞에 내놓은 결과물의 퀄리티와 그에 따른 정당한 평가뿐이다.
뮤직비디오를 내놓았을 때 대중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을 수준의 최소한의 ‘도덕적 인성’만 갖췄다면, 그 뒤는 오직 음악의 영역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티스트 개인의 부주의로 인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진심까지 부정당할 죄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더욱 철저하게 이미지가 아닌 음악으로 그들을 판단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 《Delulu Pack》은 내 머릿속에 있던 ‘기획형 그룹’이라는 키키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사실 선공개곡이 ‘Delulu’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걱정과 우려가 앞섰다. 엉뚱하고 자유로운 정체성을 강조하는, 철저히 Gen Z를 저격하려는 기획형 음악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달랐다. 가삿말의 엉뚱한 느낌과 단어들은 마치 키치한 이미지를 전시한 전시장 같은 바이브로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는 리스너로 하여금 가사 속에 숨어있는 유머가 자그마한 위로를 건네는 듯,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달콤한 망상’ 같은 음악적 경험을 선사했다.
비트는 테크하우스를 기반의 UK 사운드 특유의 칠(Chill)한 질감이 돋보였다. 굳이 이 곡의 장르를 억지로 정의하라고 한다면‘리퀴드 테크 하우스(Liquid Tech House)’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K-POP에서 듣기 힘든 사운드였고, 그 완성도가 주는 만족감은 엄청났다.
이러한 장르적 쾌감은 ‘UNDERDOGS’에서 절정에 달한다. 하이퍼팝의 뉘앙스를 한 스푼 섞은 채 Trap R&B와 Liquid Drum & Bass가 교차하는 이 트랙은, 내가 평소 가장 탐닉하던 장르들을 K-POP이라는 틀 안에서 최상의 퀄리티로 구현해낸 결과물이다.
여기서 특히 칭찬하고 싶은 건 키키 멤버들의 소화력이다. 이전까지 그들이 보여준 엉뚱함이 북미 감성을 어설프게 카피하는 ‘진정성 없는 연기’처럼 느껴져 부담스러웠다면, 이번에는 그 모든 무드를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첫 앨범 이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는지가 사운드 위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멤버들의 진정성 있는 태도가 느껴지기 때문에 그들이 보여주는 젠지(Gen Z)스러움은 과하지 않고 몰입되게 만들었다.
결국 K-POP의 본질은 멤버와 프로덕션이 하나가 되어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산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고 생각한다.《Delulu Pack》은 스타쉽의 기존 성공 공식을 완전히 배제하고도 음악적 밸런스를 완벽하게 맞췄으며, 멤버들은 그 판 위에서 자신들만의 진짜 매력을 보여주었다.
아직 1월인데 벌써 올해의 기준점이 될 앨범을 만난 기분이라 얼떨떨하다 못해 당혹스럽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점수를 훨씬 더 퍼주고 싶지만, 1월에 이런 명반을 만나버린 게 리뷰하는 입장으로서는 고통스러울 만큼 아쉽다.
별 4개라는 점수는, 이 기분 좋은 충격에 대해 차마 별 4.5개 이상의 별을 내어줄 수 없는 나의 가장 솔직하고도 지독한 리스펙이다. 앨범은 이제 제 할 도리를 다했다. 남은 것은 이 확실한 결과물에 응답할 대중의 몫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