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한때 꽃이었다

혹자의 영롱한 왕년

by 숲속의조르바



쿠바 중부의 도시 트리니다드는 과거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사탕수수 농장으로 번성했던 도시이다. 수백년간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에서 사람들을 끌어와 노예로 만들어 감시를 하며 고된 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트리니다드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몇대에 걸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죽을때까지 일만 했을 그들의 후손들일 것이다.


이들의 피와 땀으로 수확된 사탕수수로 설탕 산업이 번성하며 스페인, 프랑스 등으로부터 온 농장주들은 막대한 부를 쌓았고 도시의 중심에는 그 당시의 번성했던 건물들과 그들의 대저택들 그리고 효율적 반출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가 남아있다.


이 끔찍한 착취와 피착취의 굴레속에서 만들어진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 등이 섞인 잔해는 이색적인 정취를 만들었고 이는 오히려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트리니다드의 산업은 관광업이 유일하다고 한다. 트리니다드 뿐만 아니라 쿠바 전체가 같은 수렁에 반세기이상 빠져있다.


트리니다드 관광객들의 주요 이동 수단인 삼발이 자전거꾼이 피곤한듯 자전거 위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족히 수십년은 되어보이는 낡은 자전거가 그의 지난 삶과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를 지나 다른 골목에 들어서자 잔뜩 멋을 부린 젊은 자전거꾼과 마주쳤는데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타임슬립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의 골목에서 그의 30년 후를 본 듯 했고, 지나쳤던 늙은 자전거꾼의 30년전 과거와 마주한 듯 느껴졌다.







오래전에 보았던 조남준 화백의 발그림이라는 한 컷 짜리 만화가 생각이 났다.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청년과 중년 그리고 노년의 친구들끼리 제 각각의 테이블에서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장면과 함께 이런 말이 있었다.


청년은 미래를,
중년은 현재를,
노년은 왕년을 말한다.


가진 것 없는 청년은 미래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지금보다 나아질 미래를 꿈 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년이 된 그들은 현실을 버티는 것만도 너무 퍽퍽하고 버겁게 된다.


그렇게 치열하게 버텨내다 노년이 되면 그들의 가슴 속에 남은 것은 미래를 꿈꾸며 참고 버티고 뛰었던 날들과 버거운 하루를 버텨냈던 가버린 시간 즉, 왕년(往年)에 대한 추억과 회환 들이 남는다. 안타깝게도 꿈꿀 미래는 없고 그 힘들었던 시간 조차 그리운 것이다.


한 문장으로,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한 통찰이 꽤 인상적이었다.



트리니다드의 나이든 자전거꾼은 저 젊은이의 나이때부터 자전거택시로 삶을 꾸렸을지 모른다. 큰 변화가 예상되지 않는 쿠바를 견주어보면 어쩌면 저 젊은이는 길에서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그처럼 나이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자전거꾼들과 곧 왕년을 그리워할 나를 슬픈 굴레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 결과물이 무엇이든 모든 열매는 한때 꽃이었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