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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씀 Sep 02. 2022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준 직장 상사

내가 어른이 될 수 있게 해준 상사 K

어린 시절, 내 세상은 면목8동이 전부였다. 분명 동네를 벗어나 가끔 친척 집도 가고 놀러도 나갔지만, 우리 동네만이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아빠가 사준 지구본에서 한참 동안 우리 동네를 찾다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지구에서 우리 동네가 안 보여."

"우리는 여기 대한민국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 그리고 여기 서울 보이지? 서울 안에 우리 동네가 있어."


처음 알았다. 내가 사는 곳이 지구라는걸. 그러나  후로도 나는 눈앞의 동네밖에 모르고 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경험하고,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의 세상만   있다는  머리로는 배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게  어렵다.








20대 중반에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꿈꾸던 회사였고 모든 게 즐거웠다. 조직의 방향성도 좋았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흥미로웠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멋있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공부하며 일을 배웠다.


딱 한 가지, 무서운 팀장님이 있었다. 아직 수습 기간, 팀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그분이 너무 무서웠다. 늘 표정없이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괜히 무서웠던 것 같다. 제발 그분 팀에는 배치되지 않길 바랐는데, 수습을 마친 나는 그 팀에 배치되었다.


그분께 배우는 일은 정말 많이 힘들었다. 내가 본 서류는 빨간펜으로 가득했고, 기획안 하나만 3일 내내 수정하기도 하며 혹독하게 일을 배웠다. 돌아보면 팀장님 덕분에 일을 빨리 배우긴 했지만... 힘들긴 힘들었다.


늘 이성적이고 직설적이셨던 팀장님. 회의 때마다 매우 날카로우셨고,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셨다. '결과'와 '일'을 봐야 하는 회사에서 정말 타당했던, 무섭고 힘들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던 분이랄까.





그러던 어느 날, 큰일이 터졌다. 내가 전담하던 업무 관련 광고를 신문사에 전달해야 했던 날, 실수로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당연히 광고는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그날 마침 자취방 이사로 연차를 사용하던 중이었다.


이사 때문에 정신없던 아침, 팀장님께 연락이 왔다.


광고 안 올렸니?


직장인이라면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상사의 꾸지람이 이어졌다. 내가 잘못한 게 맞지만 계속 듣고 있다보면 왠지 억울하면서도 속상하고, 자책하게 되는 시간들. 정말 엄청 혼났다. 혼나고, 연차 같지 않은 연차를 보내고 있던 오후, 팀장님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받았을 때의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믿고 살아왔던 것을 다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싫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느낌. 어릴 때부터 실수는 하면 안 되는 것이고, 잘못하면 혼나기만 했다. 근데, 팀장님의 메일은 "너 잘못했어" 가 아니었다.



실수해도 괜찮다.


누군가 나에게 처음으로 알려줬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미리 공유해달라고. 그리고 같이 수습하면 된다고. 사회적으로는 이미 성인이었지만 정말 순수하게 새로운 것을 배운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실수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기왕이면 실수 없이 일을 완성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분명히 있더라. 그때 실수해도 주변에 제대로 알리고, 사과하고, 어떻게든 수습하고 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수를 숨기지 않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될수록 내 일상도 많이 달라졌다.








그 뒤로 팀장님과 꽤 오래 일했다. 내 투병생활도 지켜보셨고, 눈물도 지켜보셨던 분. 그분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며 말씀하셨던 “내가 있는 동안은 함께 일하자"는 약속을, 나는 지켰다.


이제 와서 함께 일할 때 가장 좋았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팀장님이다. 또 생각해 보면, 지금 내 여자친구와 팀장님은 성격이 정말 비슷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 그리고 나와는 어떤 부분이 잘 맞는 걸까.


팀장님을 만나 사람을 배웠고 어른이 된 것 같다. 지금의 나를 팀장님이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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