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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씀 Sep 05. 2023

이제는 김치를 직접 만듭니다

그녀 덕분에 다채로워진 식생활, 그리고 인생

냉장고 문을 열 때 코 끝으로 들어오는 김치 냄새가 너무 싫었다. 스무 살 때까지는 김치를 거의 먹지 않았고, 양념 범벅의 무언가는 썩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독립하고 혼자 살게 된 내게 김치를 먹지 않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탈취제나 커피 가루로 탈취하기도 한다지만, 내 선택은 아예 김치를 안 먹는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나의 작은 냉장고는 참 단조로웠다.


냉장칸에는 사과, 방울토마토, 두부, 단무지. 냉동칸에는 냉동빵과 냉동떡, 실온 보관하는 햇반과 3분 카레, 그리고 인스턴트 커피.



필요하면 그때 하나씩 사 먹으면 될 일이었고, 직장에서의 점심 한 끼로도 충분히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크론병도 있기에 속에 편한 음식 위주로 먹었는데, 위에 적어 놓은 음식들은 언제 먹어도 속이 편한 음식들이었다. 모험도 좋아하지 않고 맛에 대한 탐구도 게으른 편인지라, 딱 적당한 식생활의 크기였다.



혼자 살던 여자친구(현재 와이프)의 냉장고는 달랐다. 일단 자취방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냉장고를 부끄러워했다. 모양을 부끄러워한 게 아니라, 반찬 냄새를 부끄러워했다. 사실 내 냉장고에서 김치 냄새나는 건 싫었는데, 이상하게 연인 냉장고의 김치 냄새는 싫지가 않았다. 이게 사랑인가�



전주가 고향인 그녀의 냉장고에는 정말 온갖 양념과 반찬들이 있었다. 가끔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고향에서 부모님이 종종 먹거리를 보내준다는 그녀의 냉장고는 내 텅 빈 냉장고에 비해 많이도 풍성했다. 



우리의 냉장고에 각자 살아온 삶이 묻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집에서 부모님이 관리하는 냉장고는 늘 비어있었다. 김치, 고추장, 된장, 계란, 약간의 맥주가 전부였다. 와이프는 어린 시절 엄마(현재 장모님)가 꽤 많은 음식과 간식을 만들어줬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내 냉장고는 다 커서도 단촐했고, 그녀는 다채로웠다.








연애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다. 서로의 것이었던 것들이 우리의 것이 되기도 했다. 냉장고에도 상대방을 위한 것들이 천천히 배어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냉장고에는 나를 위한 간식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떡이나 탄산음료같은 간편식 위주. 나는 그녀를 만나고 다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들어 준 요리는 갈비찜이었는데, 모든 양념을 새로 구비하려니 재료비가 만만찮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 요리를 먹은 그녀의 반응을 본 뒤로, 내 자취방 주방은 꽤나 번잡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냉장고는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만큼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흔적이 쌓이기 시작했다. 밑반찬이 생기고, 김치가 생기고, 양념이 생기고. 나는 가능하면 외식하기보다 그녀를 위한 요리를 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다른 음식에 비해 김치는 비쌌다. 그럼에도 연애 중에도, 결혼 초에도 김치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김치없이는 밥 못 먹는 그녀를 위해 그저 사먹을 뿐이었다.








올해 초, 생활비를 낮출 겸 김치를 만들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먹고 김치 공부를 해보니 솔직히 샐러드 만드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재료를 준비하고 섞는 것. 물론 준비해야 할 재료들이 더 많은 것 같았지만.



그리고 냉장고를 살펴보니 혼자 살 때의 내 냉장고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에는 반찬이 풍족했고, 냉동실에는 보관 중인 식재료들이 넘쳐났다. 김치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도 양가에서 주신 고춧가루, 다진마늘, 새우젓 등이 있어 주재료인 배추, 무 등만 사면 되었다.



조금씩 합쳐진 우리의 냉장고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부부의 것이었다. 예전에는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먹기만 했다면, 이제는 요리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보관하는 곳이 되었다. 어쩌면 더 건강한 삶의 방식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먹지 못했던 식재료들 중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많으니까.



그렇게 우리 가족은 김치를 사 먹는 삶에서 만드는 삶으로 한 단계 진보했다. 김치를 인생에 비유해서 나만의 생각을 곁들여보자면.



그동안의 인생(김치)는 선택이었다면,

이제 인생(김치)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올 가을에는 어떤 인생을 만들게 될까�‍�




�아래는 제가 만든 김치들입니다 :)





*크론병

소화기계 전반에 걸쳐 염증이 생기는 질환. 호발 부위는 소장이지만 음식물이 이동하는 통로 전반에 다 생길 수 있다. 난치성 질환으로 질병의 경과에 따라 면역억제제를 지속적으로 먹어야 한다.



✨그녀 덕분에 처음 해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녀와의 첫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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