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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병원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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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Z Apr 28. 2020

보호자 식당.

걱정말아요 그대.


보호자 식당; 병원 안에 환자의 보호자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병원 내부에 만들어 놓은 식당. (국립 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에는 없는 말)


 흉부외과 전공의가 되고 바로 며칠이 안된 봄날, 의사 가운의 주름이 아직 빳빳하게 날 서 있던 때, 엄마가 쓰러 지셨다. 의식을 잃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 증과 구토 때문에 어느 날 아침 일어나시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있던 증상이었고 여러 병원을 찾아다녔고 정말 힘들게 겨우 원인을 알게 되었다. 청신경에 발생한 혹 때문이었다. 청신경에 생긴 종양. 학생 때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들어본 적만 있었다. 혹이 커지면서 청신경과 전정기관을 누르며 몸의 중심을 잡는 능력을 저하시키고 급작스럽게 증상을 발현시키는 질환. 엄마는 이런 혹을 가지고 산 것을 몇 년이 지나고 몇 개의 병원을 거쳐 서야 알게 되었다. 치료법은 수술밖에 없었다. 며칠간 입원 후 검사를 했고 이비인후과 선생님에게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호자란에 서명을 했다. 한쪽 청력이 없어질 것이고 한쪽 얼굴의 마비가 영구히 남을 수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동의서를 받으며 들었다. 매일 내가 환자 보호자에게 기계적으로 받고 있던 동의서 한마디의 무게가 이렇게 절망스러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서명을 했다.

 

 수술 아침 당직실에서 잠을 자고 엄마의 입원실로 갔다. 머리를 삭발한 엄마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있었다. "머리카락 반쪽만 잘라도 된다는데 모히칸족처럼 보일까 봐 그냥 삭발했어. 내가 두상이 예쁘잖아."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갔고 누나도 여동생도 아버지도 부쩍 말이 많아졌다. 찾아오는 두려움을 향해 농담이 공중을 떠 다녔다. 화면이 멈춘 것 같은 속도로 아주 느리게 가는 시간이 지난 후 엄마는 수술 이송 팀과 함께 수술장 앞으로 이동했다. 매일 아침마다 보았던 수술 장 입구의 풍경이 낯설었다. 수술장 앞 수술 준비실에 60cmX200cm짜리의 철제 침대가 빼곡히 들어섰고 긴장한 빛이 역력한 환자들이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자세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가족들과의 환자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고 수술 전 마지막 시간이다. 보호자로 통칭이 되어버리는 환자의 가족들은 자신의 가족의 손을 잡았다가 한 명씩 헤어지며 돌아섰다. 우리 가족도 별 수는 없었다. "왜 이리 병원이 춥니?"를 연신 말하며 떨고 있는 엄마의 손을 마지막까지 잡고 있다가 누나와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는 뒤돌아 섰다. 수술복을 입고 있던 나도 별수는 없었다. 엄마를 따라 수술장에 들어가 "잘 부탁합니다."라고 한마디 할까 고민하였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한 발짝 더 수술장 대기실의 유리문 한발 앞까지 걸어 나갔다가 "엄마 잘해...... 요."라고 한마디 하고는 뒤돌아 나왔다. 멍하니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모르고 자동문이 열린 틈에 자신의 환자들이 보일까 두리번거리는 보호자들 속에서 같이 서있는 작아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훌쩍거리는 누나와 여동생은 한쪽 벽 뒤편에 붙어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우리라도?"

내가 한 소린지 아버지가 한 소린지 기억은 전혀 않지만 우리는 밥을 먹기로 했다. "어느 식당에 갈까? 어디로 가지? 너 수술 없어? 나가서 먹어도 돼?" 수술 장 뒤 층계를 내려가면서 의미 없이 "누나가 결정해. 아빠가 결정해요. 네가 병원 근처는 잘 알잖아. "라고 말하다가 병원 보호자 식당에 갔다. "그냥 여기서 먹자." 다들 식판인지 접시인지를 들고 배식해주시는 아주머니들이 주는 시뻘건 깍두기를 담고 반찬을 담고 밥을 뜨고 설렁탕을 받았다. 허연 국물에 소면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무 맛이 없었다 지독하게 아무 맛도 없었다. 하지만 초조한 입을 막으려면 입안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야 했다. 입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가는 순간에는 공허함에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대지 않을 테니까. 깍두기를 먹었고 후추를 잔뜩 뿌리고 국물을 마셨고 소면까지 깨끗이 비웠다. 밥을 다 먹어갈 때쯤. 누나 이던가 여동생인가가 "엄마 마취 끝났을까?"라고 물어보았다. 잠깐 정적이 있었고 나도 아버지도 잘 진행되고 있겠지 하고 덤덤히 대답했다. 우린 식당을 나오면서 보호자 식당밥이 꽤 괜찮아. 병원밥도 맛있는 걸? 정도의 말을 했다. 아니 딱 그 정도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얼굴이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한쪽 청력은 반드시 잃게 된다는 것을 아무도 자세하게 말하거나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잠시 돌아갔다. 나는 병원에서 일을 했고 누나 동생 아버지도 각자의 자리 비슷한 곳에 가서 자신의 일을 하며 오후까지 더딘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중환자실로 나왔다. 퉁퉁 부은 채 나온 엄마의 얼굴은 마비되지 않았고 수술을 집도한 교수님은 수술이 잘되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엄마는 퇴원을 했고 얼마 후 엄마는 다시 입원하였다가 한참 후 퇴원을 했다. 물론 청력을 잃었지만 안면 마비는 발생하지 않았다.


 요즘도 나는 수술장에 들어가기 전 손을 흔들며 유리문 사이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는 보호자들을 본다. 잘 다녀오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서로 초조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난 내려가서 따듯한 보호자 식당의 밥을 드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 밥은 어쩌면 보잘것없었고 맛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두려움을 초조함을 함께 삼킬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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