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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TOSTEP Apr 18. 2023

봄에 쓰는 가을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국어시간과 별도로 작문시간이 있었다. 요즘도 교육과정에도 그러한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제법 오래전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작문시간이 있었다. 아마도 나의 대학입시에서는 논술이라는 부분이 나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문시간이 정규 과정에 편성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1~2학년때는 그다지 중요하다 느끼지 안 하던 이 작문시간이 고3에 올라갈 때쯤 돼서 뭔가 더욱 중요한 수업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으로 보아 대학입시에서의 중요도가 올라갔던 것 같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연히 그렇겠지만 항상 교사의 수는 부족하고, 당연히 국어교사가 작문수업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작문수업의 비중이 높아지다 보니 지금으로 치면 기간제 교사라고 해야 되나? 잠시나마 작문수업을 맡아 줄 선생님이 고3 때 새로 배정된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너무나도 작문교사의 스테레오 타입 같은 이미지였다. 사각의 형태를 띤 둥근 모서리의 안경테 안에 무한히 어지러운 렌즈가 끼워져 있는 안경을 쓰시고 더벅머리를 하시고, 뭔가 사명감이 가득하셨던 분이었던 것 같다.)


 작문시간이 중요해진 것이 결국 대학입시의 논술비중이었기 때문에, 주로 작문시간에는 '신문 사설 읽기' '신문사 주필들의 논설 읽기' '삼단논법' 등 뭔가 서론-본론-결론으로 이어지는 형태의 글 쓰는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적절히 제시하는 방법들을 주로 배웠던 것 같다. 약간 글을 통해 누가 서로 잘 싸우나 이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사실 스스스로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괜찮은 수업과정이었고, 결과적으로 대학입시에서 득도 보았다. 


 대체적으로 입시를 위한 기술적인 수업일 수밖에 없다. 여하튼 고등학생의 유일무이한 목표는 대학 입시니까.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청춘드라마 같이, 새로 부임한 작문교사는 조금씩 다른 방식을 적용했었다. 즐거운 글쓰기랄까? 대학입시를 위한 것이 아닌 진짜 말하고 싶은 것. 진짜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전달하는 방식. 나만의 이야기를 쓰는 방식을 많이 가르치려고 했었다. (*사실 대학입시에는 맞지 않는 방법이라고 보지만) 당시에는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고등학생의 나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 XX, 바빠죽겠는데 이게 뭐 하는 거람?' 전형적인 에너지가 가득 찬 고등학생이었으니.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얘들아 봄이다. 가을이 끝날 무렵이면 너희의 고생도 끝나겠구나. 봄이지만 가을이 끝날 무렵을 생각하면서 글을 써보자. 다음 시간까지 '가을'을 주제로 시를 써서 제출하기 바란다. 숙제지만 제출한 시는 학교 백일장에 작품으로 출품도 하고 좋은 시는 수상할 수도 있으니, 꼭 제출하고."

 

 詩라니....... 감히 남자 고등학생에게 그것도 고3에게 詩라니, 이것은 마치 메탈리카와 판테라의 헤비메탈 음악에 심취해 있는 척 사는 나에게 H.O.T음악을 들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조중동을 비롯한 모든 신문 사설을 씹어먹고 있는 레지스탕스 같은 고3남자아이에게 말랑한 詩라니... 이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詩'라고 하기엔 이상했을지도 모를 말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과학적 사실과 순간적으로 느꼈던 당시의 나의 감정들이 때마침 맞아 들어가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십수 년의 詩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낙엽:葉]


나 죽어감이 너희들의 유희로 계속된다. 

태워짐과 말라비틀어짐의 고통 속에 빨간 피와 누런 고름이 흘러내려도

그 누구 하나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구나. 

나의 죽음을 통해 그대들이 느끼는 유희가 다가 올 너희 고통을 치유한다면

빨간 피와 누런 고름이 검게 굳어질 때까지 아파하겠다.


유희가 끝나간다.

나 푸르던 내 몸 활활 태웠다. 

너무 타버려 붉어진 내 육신은 이제는 너의 발로 떨어진다.

나 어서 떨어져 쉬고 싶다. 

이 고통의 굴레는 또다시 오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쉬고 싶다.

너의 발로 떨어진 나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세상 너를 데울 테니,

다시 맞이할 굴레까지만 나를 쉬게 해 주오 나의 주인이여


푸르러지는 그 시간이 오면 다시 고통 속에 나를 던질 테니, 

이제는 쉬게 해 주오



 어휘의 선택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난 이런 느낌의 詩를 썼던 것 같다. 누군가가 보고 즐기는 것들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 속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그런 감정을 노래하고 싶었던 같다. 고3의 치기가 엄청나지 않아나 싶다. 고3 시절 나의 봄에 쓰는 가을은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내가 만든 시간의 희생노래하고 싶었나 보다. 지금의 나는 어떤 봄에 쓰는 가을을 노래하는가? 지금의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불타고 떨어진 낙엽 같겠지만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래야 한다. 나의 봄은 가을에 불타 없어지겠으나 어쨌든 봄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어쩌면 이런 굴레가 계속되는 것이 사는 것일지도. 


"당신의 봄에 쓰는 가을은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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