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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석 Dec 26. 2024

다만 악에서 손주와 날 구해줘유

이대론 못 살아, 너 없인 못 살아!

할미가 심은 의심의 씨앗은

며칠밤 꿨다던 그녀의 꿈들이 정량의 물을 주고,

꿈보다 해몽은 볕이 잘 들도록 해주었으며,

그릇된 신념 사이사이 선선한 바람도 불어주어,

마침내 확신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니. 할미의 노심초사한 의심들이여.

그 와중에 나는 의도치 않게

할미가 애지중지 일군 추리의 텃밭에

되려 잘 듣는 식물영양제를 꽂아준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정부에서 지원하는 안심전환대출 신청 기간이 도래한 때문이었다.

안심전환대출은 변동금리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개인에게

주택금융공사가 대출받은 은행의 채권을 사들여서,

다시 낮은 고정금리의 분할상환대출로 전환해 주는 제도였다.

변동금리로 대출을 받았던 나는 다행히도 자격요건이 충족되어서,

안심전환대출 대상자가 되었다.

그런데 주거래은행에 가서 기존 대출을 상환하고 받은 확인서 한 장이

할미를 활활 불타오르게 했다.


"내가 지금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나 이러다 너땜에 오늘이라도 죽것다. 이제 못 살어 나는. 내가 알어."


마침 식탁 위에 할미가 가위로 입구를 싹둑 잘라 깔끔히 마시고 놓인 

6년 산 홍삼 파우치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본론을 말하기 전에 장황한 서두로 시작되는 할미의

목숨을 담보로 엮는 메시지는 늘 한결같다.

그때마다 참을성을 갖고 무슨 일이냐는 답변만 거들어주면

곧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할미는 서재방에 둔 안심전환대출 확인서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넌 워째서 그 여자한티! 집을 말아 처먹으려고 작정을 한겨!!

그 여자 이름으로다가 이걸.. 이제 어떡허냐아아아"


나는 내리락 오르락 밀고 당기는 할미의 현란한 끝음을 들으면서,

대출확인서에 적힌 은행 담당직원의 이름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전환대출 업무를 친절히 도와준 여성 분이었다.

나는 이 안심전환대출이 높아져가는 변동금리를 대신해

가계 부담을 덜어주게 돼서 참으로 안심이었는데,

같이 사는 연상녀만 은행직원을 '그 여자'로 오해하고 심장이 벌렁거린다고 했다.

이제 곧 뿌려놓은 쌀, 소금으로는 부족하니 팥을 구해올지도 모른다.

그러게. 어떡허냐아. 이 할미를...




게다가 은밀히 보관해 둔 집문서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할미는 그 문서봉투 입구 앞에 웬 연고 하나를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그녀는 등기권리증이 안녕한지 세밀히 살펴본 다음,

이를 지킬 연고 하나를 정찰병처럼 곁에 둔 것이었다.

'니가 집문서를 만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연고의 위치가 달라질겨.

절대로 그 년한티 안 뺏겨. 난 이러다 죽어. 못 살아!'

연고 위에 말풍선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면,

 안에 딱 들어갈만한 할미의 메시지였다. 


그 후로 다달이 나가는 대출금리가 낮아진 대신,

할미의 경계태세는 더욱 높아져 갔다.

심지어 운동을 다녀올 때는 집으로 향하는 역 앞에 서 있다가,

털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내 뒤를 조용히 따라온 적도 있었다.

이럴 거면 같이 걷고 오자 말해도 소용없이

할미는 나와 내통한다 믿는

홀로그램 같은 그 여자를 죄악시했다.

또 내가 잠들기 전이나 자고 일어날 때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할미의 음성은 자주 들렸고,

늘 주된 내용은 나와 문제의 그녀였다.


"두구 봐! 피눈물을 흘리는 날이 있을 거니께! 난 너 없인 못 살아!"


할미는 못 사는 이유도 참 다채롭다.

혐관 로맨스 대사도 이럴 순 없다.

도무지 저 혼잣말의 행간을 읽기 어려웠다.

그리고 나도 두고 보고 싶다. 

대체 함께 피눈물 흘리게 될 그녀는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급기야 할미는 집에 있는 칼 두 자루를 수건에 둘둘 말아

자신의 베개 밑에 깔고 잠이 드는 충격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그 칼들이 수건 밖으로 빠져나올 때,

그리고 다시금 수건에 말아져 할미의 뒤통수 밑으로 들어갈 때,

과연 이 집에서 할미를 지키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몽롱했다.

이러지 좀 말라는 나의 만류는 들어 먹히지 않았고,

특히나 나로 인해 행해지는 이 상식밖의 일들은

걷잡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나는 사는 동안 잠잠히 할미를 위해 기도해 왔다.

어릴 적 하굣길마다 우리 할머니 튼튼히 오래 살게 해달라고,

20대, 30대가 되어서도 할미가 오래 살게 해달라고,

더러는 내 목숨을 좀 나누어서라도 곁에 있게 해 달라 기도했었다.

두 눈에 물기를 머금고 읊었던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인지,

할미는 이름도 모르겠는 각종 몸에 좋다는 환들을 냉장고에 넣어두며 먹거나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것냐. 오래 못 살어"와는 다르게

홍삼, 녹용 파우치에 빨대를 꽂아 코로록 소리가 날 때까지 빨아먹었다.

그렇게 늘 할미의 손과 발은 따뜻했고 여전히 내 옆에 있어주었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 말랐던 몸에는 나날이 살이 붙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기운을 차리고 나서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모습으로

너 없인 못 산다며 정작 나를 못 살게 굴고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모르는 형을 만나 그동안의 일을 들려주었다.

우선 너에게 이런 짐들을 지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형은,

고민 끝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말했다.


"혹시 너를 일찍 헤어진 할아버지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따로 떨어져 살 때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니 일을 걱정하고 건강 챙기며 일했음 했던 거랑 너무 다르시니까.."


나는 팔짱을 끼고 노려보던 할미를 떠올리다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건...

어쩌면 니가 언제라도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다시 혼자가 되진 않을까 두려워서 그러신 것 같애.

본가에는 들어가기 싫어하시잖아.

그리고 니가 연애를 하는 거 자체는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니까

너 말대로 너와 할머니의 공간을 그 여자가 위협한다가..

물론 말이 안 되는 얘기들이지만 할머니에겐 말이 되고 설득력이 있지.

아무래도 할머니 연세 잡수시고 마음 약해지고 외로워서 그러신 거 같다."



나는 결혼을 앞둔 그녀와 커피를 마시며 제안한다.


내겐 사랑하는 친할머니가 있어.

우리 할미 모시고 같이 사는 거 어때?

할미가 코지한 걸 좋아해서

종종 컴컴한 집에서 갑자기 놀래키는 것도 좋아하고

가끔 취미로 싱크대에서 불멍도 하고..


내 얘기를 잠자코 듣던 그녀는

그거 너무 좋겠다며 마시던 커피를 내 정수리에 들이붓고 카페 밖을 나간다.



나는 상상해 봤다.

파혼을 의미하는 그녀가 남기고 간

머리 위 얼음 몇 개처럼 띵하고 서늘한 감정이 들었다.

할미는 정말 내가 당신을 떠날 수 있다 생각하는 걸까.

어떤 추측에도 무게감이 실리지 않았던 나는

어찌할 바 모르겠는 마음만 더 커졌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형이 말했다.


"우리 교회 목사님 하고 할머니 좀 뵈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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