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뎌낸다는 것
세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할미의 수술이 끝났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전방으로 접근한 인공뼈 삽입이
워낙 잘 맞춰져서 후방 접근까지 수술을 이어가는 건 배제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수술은 잘 끝났다는 의미였다.
중환자실로 이동한 할미는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은 채로 잠들어 있었고
호스에 호흡을 의지하고 있었다.
할미의 삶을 통틀어 가장 어렵고 큰 수술이었고,
나 역시 그런 할미를 중환자실이란 곳에서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할미가 다시 쩌렁한 목소리로
"어휴 쓰밸 말도 말어! 까딱하다 죽는 줄 알았다니께!"
병상에서 일어나 투박하게 외쳐주기를,
그래서 성공적인 재활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할미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지나 중환자실을 벗어날 때까지,
나는 잠든 할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할미를 보살펴줄 모두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었다.
중환자실을 나온 나는 환자 관련 정보를 위해
보호자의 신분으로 간호사와 별도의 공간에 들어갔다.
컴퓨터 모니터에 문진표같은 문서가 보였고,
간호사는 내게 할머니에 관련된 것들을 하나씩 물으며 내용을 채워갔다.
그때 기재해야 할 가족 관계란에
'손자'인 나 혹은 '손녀'가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이런 경우가 흔치 않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할미의 이름, 주민 번호부터
복용 중인 약들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려드리고 간호사에게 물었다.
"할머니 깨어날 동안 같이 있어도 되나요?"
이 공간을 빌어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밤새 할미 옆에 있을 수 있다는 막연한 착각을 했었다.
중환자실이 어떤 곳인지 상식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할미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부리나케 집으로 가서
칫솔, 틀니, 갈아입힐 옷 등을 챙겨 왔다.
내 질문이 간호사 입장에서는 이 코로나 시국에,
코로나가 아니라도 중환자실인데 무슨 말씀이시죠.. 스러운 표정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할수록 난 제정신이 아니었고,
할미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강박이 정상적인 판단을 막아섰다.
"아 그렇죠.. 제가 뭘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십수 년 전 밤을 따다 허리를 다친 할미를 보러 병실에 찾아갔던 때가 떠올랐다.
하필 늦게까지 이어진 회의 때문에 병원으로 곧장 갈 수 없었지만,
문이 잠긴 이후라도 도착하면 열어주겠다는 병원 담당자의 감사한 배려 덕분에
할미 옆을 지킬 수 있었던 어느 날 밤처럼.
다친 건 당신인데 내 잠자리가 불편치 않은지 살피던 강인한 할미에게 안도했던 것처럼.
이 나이 먹도록 중환자실의 보호자란 무엇인지 몰랐다는 자책보다
마음먹으면 함께일 수 있었던 것처럼,
아무리 늦어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떼쓰며 요행을 바라듯 할미 옆에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오늘 너에게 일어난 일은 그런 것과는 달라.
지금부터 정말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온전히 받아들여.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집안이 부쩍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바닥에 놓은 쿠션에 두 발을 올리고 티비를 보던 할미도,
일이 늦었던 나를 못마땅해하던 할미도,
내가 오자마자 "밥은? 그래 먹고 왔으니 잘했구먼.... ... 밥은 먹었냐?"
두 번 세 번 같은 질문을 하던 유별난 우리 할미가 없다.
부러진 변기 커버와 구겨진 담요가,
빗물이 묻은 운동화 자국이 거칠게 찍힌 거실 바닥 모두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의 전등이 힘없이 껌뻑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꺼질 것만 같은 감정을 달랠 방법을 몰랐다.
이제는 목에 걸고 다니겠다고 줄을 매단 할미의 출입키도
두부를 붕어빵을 과일을 헐떡이며 사 올 때 들고 가던 손지갑도
매일같이 함께하던 주인을 잠시 잃고 말았다.
방에서 뀐 내 방귀 소리에 문을 열고선 왜 부르냐고,
갑자기 "할머니!!!"하고 큰 소릴 냈지 않냐는 할미 말에 낄낄 웃던 우리의 그때 그 시간.
그런 평범한 한 조각 일상마저 특별해질 만큼 모든 게 멈춰 섰다.
이토록 되돌릴 수 없는 아픈 시간을 알 수 있었더라면,
할미와 어제 저녁이라도 정말 맛있는 걸 함께 했을 것 같다.
너무나 소소했고 평범하게 흘러갔던 할미와의 지난 하루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할미와의 면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30분 동안만 가능했다.
직업 특성상 오전 시간이 자유로운 나는 화, 수, 목, 금 나흘동안 면회 가능했고
나머지 사흘은 엄마, 아버지, 형이 가도록 정했다.
우리 외에 다른 면회자나 환자 중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면
30분의 면회마저 허락되지 않는 야속한 시절이었다.
할미의 수술이 있고 난 다음날 일요일은 엄마가,
월요일은 아버지가 면회를 다녀왔다.
그때마다 나는 1인만 가능한 면회인 탓에 병원 앞 편의점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할미는 모르더라도 나 역시 보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
본가에 살 때는 그저 출퇴근길에 지나던 이 병원의 한 보호자가 됐다는 게 무척 낯설었다.
할미는 모진 수술을 이겨내고 잘 회복하고 있었고
목에 끼운 호스 때문에 대화는 되지 않았지만
입모양만으로 어느 정도 소통이 되었다고 했다.
할미는 내 이름을 입으로 지으며 보이지 않는 나를 찾았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50분경.
나는 병원의 1층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발급받고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누군가에게는 무난히 흘러갈 오늘의 이 시간,
꽤 많은 보호자들이 중환자실 입장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만의 두터운 공기와 특유의 소독냄새에 가슴이 약간 두근댔다.
오전 11시 정각에 나를 포함한 보호자들 모두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서두르는 면회자들 사이로 나 역시 할미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할미는 나를 발견하고 팔을 위아래로 저었다.
목에 끼워진 호스가 이물감이 있다 보니 무의식 중에 손으로 뺄 수 있어
할미의 양팔은 끈에 묶여 있었다.
링거 주사가 꽂힌 할미의 팔은 붉게 멍이 들었다.
할미의 손을 잡으니 굳센 악력이 느껴져 안심이 되었다.
나는 할미가 정말 큰 수술을 했고,
결과가 아주 좋아서 회복만 잘하면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일주일에 네 번은 하루도 빠짐없이 할미 보러 올 거니까
걱정 말고 치료 잘 받으면서 건강히 있자고 했다.
할미는 할 말이 있을 때마다 당신의 손으로 내 팔을 탁탁하고 다급히 쳤다.
나는 그때마다 얼굴을 가까이하고 할미의 입에 집중했다.
집..
집 가자.. 집.
할미는 우리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하루의 청소를 마치면 머그컵에 믹스커피를 담고
끓인 물을 한가득 담아 식히던 일상의 오전으로.
커피를 식히는 동안 창밖을 보며
"이제 좀 쉬자..." 한 마디가 묘한 평온을 불러오던 그때 그 시간으로.
할미는 그런 소소함까지 허락된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할미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치료받는 거라 말해줬다.
그래야 할미 좋아하는 추어탕도 갈비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불안해 말고 여기서 조금만 더 지내라고 안심시켰다.
할미는 간호사와 대화 중인 나에게 잠깐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 팔을 손으로 탁탁탁.
자기와 얘기하자고 했다.
늘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할미 말을 들어주는 게 대부분이었던 내가,
제한된 30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30분 다 됐대. 이제 나가야 된대. 나 쫓겨나네"
할미가 빙긋 웃는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지금처럼 점차 회복 후에는 일반 병동으로 가서 재활에 매진하고
조금씩 나아지는 할미를 마주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면회가 끝나고 만난 담당의에게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내게 할미의 재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을 또 한다고요?"
전방 접근으로 맞춰 넣은 인공뼈는 테트리스처럼 꼭 맞게 삽입이 되었으나,
문제는 이 인공뼈가 빠졌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전 후방 절개로 단단히 고정을 했으면 더 확실했을 일이다.
하지만 워낙 수술의 결과가 좋았고 후방 절개는 앞서 말한 과다출혈과
환자가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에 진행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외과 측 판단은 후방 절개 수술로 단단히 인공뼈를 고정하고,
환자의 회복을 기대하는 게 맞다고 한다.
반대로 내과 측에서는 환자에게 무리라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
설상가상 할미에게는 그 사이 폐렴 증세까지 올라왔다.
보호자인 내 입장에서는 점점 화가 올라오는 복잡다단한 마음이 들었다.
환자를 위해서 진행하지 못한 위험한 수술을,
결국 환자를 위해 불가피하게 그것도 두 번이나 받아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심지어 불과 3일 전에 받았던 수술보다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수술의 진행 여부는
보호자인 나와 가족의 의사에 달렸다고 했다.
이 수술에 동의하면 오늘 오후에 재수술이 진행된다.
우선 나는 회의가 약속된 분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예정된 출근을 취소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번갈아가며 전화로 상황을 전했다.
할미가 재수술을 포기하면 지금 상태 그대로일 뿐 재활을 기대할 수 없다.
할미가 재수술을 진행하면 수술 중 사망을 염두에 둬야 하지만,
성공적으로 마쳤을 경우 예정된 재활을 기대할 수 있다.
나는 병원 안팎을 드나드는 차량들과 환자들과 보호자들 사이에 멀뚱히 서서
토해내듯 밀려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미 큰일이 일어난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고작 오늘 하루 할미와 면회를 하고 다 낫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누워있는 할미를 두고
이토록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게 사무쳤다.
무엇보다 보호자로서 어떤 도움과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가족들과 2시간 정도의 고민과 대화 끝에 수술을 결정했다.
"할머니가 수술을 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계속 고통을 느끼나요?"
담당 의사에게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진정 할미를 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간을 들여서라도 병원 밖을 나오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집 가자... 집.'
내 팔을 톡톡 치며 꺼낸 할미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 할미가 저곳에 누워있는 게
재활을 위한 병원에서의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내가 누워 있었다면 할미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라 믿었다.
할미를 위한 면회와 돌봄과 앞으로 진행될 작가로서의 업무 모두,
빠짐없이 잘 해내겠다는 희망 앞에 넘기 힘든 장벽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각자 하던 일들을 모두 멈춘 가족이 한데 모였다.
나는 또 한 번 동의하기 힘든 동의란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수술 경과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할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니가 이렇고 저렇고 하면 내가 깜프라찌해주고 이?
내가 이럴 땐 또 니가 깜프라찌 해주면 되잖여!"
그동안 그러려니 지나쳤던 단어였는데 문득 궁금해 검색해 보니,
'불리하거나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게 의도적으로 꾸미는 것을 뜻함.
카무플라주(camouflage)의 잘못된 일본식 표현'이라고 했다.
나는 할미가 '캄프라치'라는 단어를 어디서 배워왔을까,
갑자기 궁금하더니 옅게 웃음이 났다.
물론 이렇게까지 정확한 뜻을 알고 쓴 단어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해하기에 '서로 불리할 때 이렇게 저렇게 잘 지켜주자'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할미가 무사히 돌아오면,
다음 면회 때 할미가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야겠다.
"할미 고생했어. 이제 내가 따악 깜프라찌해줄게!"
할미가 견뎌준다면 나도 견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