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면 보이는 4월의 실금

뭐 뜨끈한 거라도 먹구 가

by 구름구

할미의 수술은 전보다 길었다.

3일 전 받은 수술의 두 배가 넘는 시간이 지났다.

나는 6시간이 넘도록 어떤 결과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길어지는 수술의 의미를 몰라 조급했다.


나는 이대로 기다리면 된다지만,

할미에게 기나긴 수술이 버거울까 걱정됐다.

그렇게 어느덧 오후 4시경에서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각자의 이유로 대기실을 지키던 다른 보호자들도 점차 보이지 않았다.



새벽 1시가 다 되었을 무렵,

얼굴에 땀이 맺힌 담당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8시간에 걸친 엄청난 수고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할미의 수술이 잘 끝났다고 한다.

이번에도 할미는 견뎠다.

견딘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수술대에 몸을 맡겼겠지만,

이 모든 상황을 알았더라도 할미는 견뎠을 것이다.


나는 할미가 너무도 벅차고 힘들면

애써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오로지 하나만 바란다.

제발 살아 돌아와 주기를.

나 역시 그런 보호자였고

할미가 이겨내지 못했다는 결과를 들었다면

처참히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할미가 평온할 수 있다면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아프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아니,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할미가 힘든 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미는 이겨내기를 택했고

나는 그녀의 의지를 알아먹고 도와야 한다.


일찍 출근을 앞둔 가족들에게는

상황을 알려줄 테니 먼저 들어가라 말했다.

나는 안내받은 대로 중환자실 앞,

보호자 대기실에서 할미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적막과 고요가 익숙한 그곳에서 30분 남짓한 시간이 더 흘렀다.

수술을 마친 할미를 다시 만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한 고비를 넘기니 또 다른 걱정이 달라붙어

다음을 각오하고 대비하게 했다.


중환자실에 도착한 할미의 얼굴은 몹시 퉁퉁 부어 있었다.

할미를 실은 이동식 침대가 내 앞을 지나갈 때도

순간 알아보기 힘들 만큼의 얼굴이었다.

폐렴 증세까지 안고 한차례 더 무거운 수술을 겪어낸 할미를 지켜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옆에 있음을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러니 무서워 말라고. 울지도 말라고.

할미의 단단함 덕분에 덩달아 나도 버티고 서 있는 거라 말하고 싶었다.

언제나 내게 큰 그늘이 되어준 어른 할미가

오늘은 참 장하게 느껴졌다.

무사히 중환자실로 돌아온 할미 덕분에 희망은 유지되었다.




할미가 비운 집에 혼자 있는 시간들이 낯설다.

억지로라도 잠을 자고 일어나 할미와의 면회를 마치고,

그날의 할미에게 이상이 없는지를 체크한 후 서둘러 출근한다.

당시의 나는 국악 크로스오버 경연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었다.

한 번도 제작된 적 없는 형식의 음악예능이라 나에게도 큰 도전이었고,

그만큼 해결을 기다리는 숙제들이 많았다.

마음이 평안했다면 더욱 재밌게 작업했을 프로그램이었다.

이따금 일에 파묻혔다가,

남몰래 할미를 떠올리고 가슴이 내려앉는 겁을 먹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했다.


중간중간 병원 측에서 물품구입 요청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루는 토닥이 조끼를 (폐와 기도의 노폐물을 배출하도록 돕는),

다른 날은 성인용 사각 기저귀와 물티슈, 도넛베개, 손톱깎이 등을 미리 준비했다.

익숙한 이름의 물건들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할미에게 필요할 거라 생각하고 살아본 적 역시 없었다.


수술 후의 할미는 빠르게 부기가 가라앉았고

여전히 나와의 의사소통도 잘 됐다.

할미의 폐렴이 가라앉아야 비로소 일반병동으로 옮겨져

회복과 재활을 기대할 수 있다.

기도삽관으로 호흡을 하다가 삽관을 뺀 자가호흡을 시도하기도 했고,

무리라 판단될 때는 아쉽게도 다시 삽관에 의지하기를 반복했다.

4월 초의 봄날,

할미는 창문 밖 만개한 목련을 바라보았다.

나는 할미의 삽관 튜브로 삐져나온 객담을 물티슈로 닦아주며

활짝 핀 꽃을 바라보는 할미를 내려보았다.

내게는 꽃보다 할미였다.


언젠가 할미와 함께 파주의 한 수목원에 가서

부지런히 심어진 갖은 꽃들과,

비처럼 쏟아지는 벚꽃 잎을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할미는 떨어지는 벚꽃들 사이로 푸르고 너른 잔디를 보면서

"여자덜은 쑥, 냉이 이런 거에 환장혀"같은 뜬금없는 소릴 했다.

그렇게 봄에 핀 꽃보다 봄철 나물 손질하는 걸 좋아하던 할미는

목련 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부쩍 따뜻해진 햇살을 받고 모든 게 되살아날 듯 풍성한 봄기운이

우리 할미에게도 허락됐으면 했다.

할미한테도 쑥, 냉이만큼이나 일정 몫이 관대히 나누어지기를 바랐다.

잠시 누워있다 보면 언제 푸르러졌는지 모르도록.


면회 중간마다 할미는 가늘고 긴 호스를 삽관 안으로 넣어

가래와 침을 빼내는 일을 주기적으로 겪어야 했다.

헛구역질로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는 것뿐이었다.

나는 이 답답한 호스 얼른 빼고 할미 목소리 좀 듣자고 말했다.

진정한 할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의 면회도 끝나갈 때쯤 내 팔을 다급히 치는 할미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뭐 뜨끈한 거라도 먹구 가. 알었지?"


당신의 힘으로 가래를 뱉지 못하면

기관 절개를 해서라도 자가호흡을 시도해야 되는,

몇 주 동안 쌀 한 톨 먹지 못한 할미가 그 와중에 내 빈 속을 걱정한다.

가까스로 대답한 나는 참기 힘들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할미에게 나는 쭉정이 같은 손자였고

여전히 나의 보호자였다.

평생 들어왔던 저 한 마디가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만,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았다.

어느 슬픔 너머의,

조금 더 빨려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감정을 겪을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힘든 건 나 아닌 할미니까 주워 담기 힘든 아픔을 쏟고 싶지 않았다.


출근 내내 목구멍이 쪼그라드는 아픔이 계속됐다.

애정하는 계절인 봄은 매정했다.

매년 고대하던 4월은 잔인했다.

눈앞의 사랑스러운 풍경들에 조금씩 실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