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경에 처한 뒷받침

할미와 무엇을 어떻게

by 구름구

올해도 벚꽃이 피고 지고 아까시꽃향이 가득하다가,

이내 밤꽃향이 풍기더니 봄이 지나가버렸다.


일반 병동으로 옮긴 할미의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간병인의 솜씨였다.

몇 달간 식사를 못 한 할미의 얼굴은 부쩍 야위었고,

짧은 백발 스포츠머리는 꽤나 잘 어울렸다.

일반 병실은 면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칙적으로 상주보호자 1명을 제외한 면회는 출입이 금지된다.

할미에게 허락된 보호자로 간병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면회가 고픈 내 입장에서는 병원 측과 할미 모두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받은 연락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할미를 잠깐씩이라도 만나서 마음의 안정을 주고 싶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는 간병인을 통해 그날의 할미 상태를 물었다.

나는 매일 할미를 살피러 갈 때마다 희망을 담았다.

마음 같지 않은 회복 상태,

어제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인 시간들,

그 속에서 희망의 입자라도 발견되길 소망했다.


어느 날은 기관절개술을 받은 할미에게서

말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간병인에게 여쭤보니,

아주 가끔씩 튜브 위치에 따라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셨다.

할미는 거듭되는 섬망증세에도

내 이름을, 내가 손자임을 잘 기억해 줬다.


"너 아직 그 집에 살고 있냐?"


난 아직 이 집에 살고 있다.

할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옷가지와 이불도 말끔히 세탁해놓은 채로.

나와 같이 살았음을 기억하는 것 같으면서도,

할미의 묘하게 생경한 물음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척해진 할미는 여러 약을 복용 중이었다.

혈관을 수축해 주는 저혈압 치료 약부터

치매 예방약, 세로토닌을 조절해 주는 우울증 약,

위장관 개선약, 제산제, 정신 과흥분 개선제 등

누워만 있는 할미에게 처방되는 약들의 개수는 엄청났다.

3월부터 금지된 일반식은 4달째 이어졌고,

간병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할미가 돈 줄 테니 쌀 좀 사 와서

밥을 해달라는 부탁은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할미 스스로가 누워 있는 채로 얼마나 버겁고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이 풀어헤쳐지듯

조금만 견뎌내면 다시 좋은 바람이 불고,

예전처럼 손을 맞잡고 걷고, 마스크도 벗고,

집 밖에서도 들리던 할미의 기운 센 목소리를 그리워했다.

당연하다는 표현보다 더욱 당연했던

일상의 토막들이 당연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저 슬프기만 한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할미의 담당의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나는 담당의가 면담이 가능한 날짜와 시간에 맞춰 그를 만났다.

의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할미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고,

폐렴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나 개선되지 못하며

욕창의 정도는 높은 단계라 했다.


보호자에게 희망을 기대할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병원에서 할미의 회복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치료의 소임은 다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할미가 있을 곳은 요양병원이었다.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디로 둬야 할지 모를 시선이 의사에게로 머물렀을 뿐이었다.

할미의 의지와 가족의 희망이 우스운 꼴이 된 것 같아 무안한 감정이 일었다.

고생스러울 할미가 안쓰러웠고

이 병원을 나서게 해 줄 수 없는 나는 뭔가 부끄러웠다.


입, 퇴원을 담당하는 원무부 담당 직원과 나는

그 이후로 여러 번의 실랑이를 벌였다.

할미의 차도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미는 비극이었다.

결국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나의 잘못일 것이고

보호자라면 받아들여야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산과 파주에 마련된

요양병원 리스트를 건네는 담당 직원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내 입장에서는 우리 할머니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는 수순을 밟는 것 같다고.

여기서 더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담당직원은 이런 상황에 놓인 보호자들을 참 많이도 응대했을 것이다.

제각기 성향도 태도도 달랐을,

슬픔에 잠식된 보호자들을 상대하는 직원은 능숙하고 침착하고 냉철했다.

더욱 위중한 환자들의 진료를 위해,

이곳은 요양병원의 성격을 띠면 안 된다는 게 직원과 병원의 뜻이었다.

요양병원에서 할미의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을 상황이 되면

그때는 재입원이 가능하다 했다.

말도 안 됐다.

맞는 말에 말이 안 됨을 밀어넣고 실컷 믿었다.

나는 시기가 왔다는 걸 알고 있어서 더더욱 몸부림쳤을 것이다.

병원의 방침대로 결정지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대책 없이 우겼다.

매주 청구하시는 병원비 꼬박꼬박 내며 치료받겠다는데,

왜 자꾸만 나가라 하냐는 말은 왜 했을까..


어쩌면 나는 병원 측과의 대화 내내,

차마 직원이 건네지 못한 이야기들을

마음속 어딘가 지레짐작 가둬놓고 덮어두었을 것이다.



보호자의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과정을 겪습니다.

좋아질 것이고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꺾이고 있음을

마주하기가 무척 힘들겠지요.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감당하셔야 돼요.





어릴 때 감기 하나로 위액까지 게워내며

며칠째 앓아누웠던 나는,

할미의 손에 이끌려 인천의 큰 병원에 입원했었다.

당시 유아였던 나는 남자 입원실에 자리가 나지 않아

여자 입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나를 입원 치료시켜야겠다는 할미의 억척스러운 요청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니가 계속 토하기만 하고 까무러지니까 얼굴이 샛~노래졌어.

그래가지고는 내가 아!!! 널 입원시켜야것구나!

해서! 우리 손주를 어떻게든 당장 입원 시키쇼, 빡빡 우겨서 그리 된 거여.

그랬더니 딱 입원을 시킨 날에 니가 깨동깨동 살아나가지고 여기 뛰어 댕기고 저리 뛰어 댕기고~"


가끔씩 옛일을 들려줬던 할미의 말대로 난 그때를 잘 기억한다.

입원을 했던 날부터 몸이 괜찮아졌고,

최연소 환자인 내게 매일 과자를 챙겨주던 아주머니도 생각난다.

퇴원 날에는 함께 묵었던 몇몇 환자 분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기도 했었다.

스스로 일어설 줄 모르던 때에,

할미는 크고 작은 어려움마다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내게 늘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너는 절대 안 굶겨! 그니께 걱정 말어!"


나는 면회 때마다 할미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할미가 날 그렇게 키워줬으니 이제 내가 잘 지켜줄 거라고.

할미 마음 단단히 먹고 어떻게든 이겨내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 할 수 있다고 말했던 나는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어,

할미 보기가 많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나는 얼마나 더 억척스러워야 하는지,

어떤 묘수로 할미를 일으켜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달을 누워있으면서도 형에게는

"느이 동생 밥을 차려준 지 오래됐으니 집에 좀 가자" 했다던 할미에게

나는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거스를 수 없는 때가 다가왔으니,

할미를 받아줄 다음 선택지를 찾아보자는 한 줌의 침착함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형이 다니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일산의 한 요양병원에 할미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더 미룰 수도 고집할 수도 없는 막다른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2주일 넘도록 빨리 감기 하듯 다양한 병원들에 연락도 넣어보고

최대한 비교해 보며 선택한 곳이었다.

현재 할미의 상태로는 받아줄 수 없다는 병원들도 있었다.

나는 걱정도 노심초사도 많은 할미에게,

그녀를 더 잘 치료해 줄 병원으로 옮기려 한다 말해줬다.

그동안 할미를 안심시키려고 해 왔던 숱한 거짓말들 중 하나였다.


요양병원 측에 전달해야 할 의사의 소견서와 복약지도서,

퇴원안내문과 문자를 받고 나니 공허했다.

수달 간 매달려온 단단한 매듭이 풀린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좋은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소리 없이 지나가버린 봄.

그리고 7월이 끝나기 전의 여름.

나는 요양병원행 구급차에,

나보다 겁나고 무서웠을 할미를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