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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석 Jun 03. 2024

우리가 얼룩지지 않았다

사라진 주민증과 얼룩진 피케이티셔츠

할미는 인천 집에 다시 다녀오자 했다.

이사를 끝마친 텅 빈 곳에

카드만 한 주민증을 놓고 왔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나는 할머니에게 한번 더 잘 찾아보라 했지만,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행여나 분실한 거라면 재발급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넌 왜 사람이 말을 하면 믿질 않어.

내가 깜빡하고 장판 밑에다 두고 왔다니까 그려!"


할미의 길게 내리다 한껏 끌어올리는 특유의 끝음이

호소력 짙은 가수의 노련한 밴딩처럼 느껴졌다.

내게서는 짧은 한숨이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장판 밑 어딘가에 잠든

신분증을 구출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그래. 오락가락도 락(樂)이고 누락도 락(樂)이라 치자.

마침 공휴일이라 도로는 안 막히니

얼마나 다행이냐 심정으로 차를 몰았다.

자유로에 진입하니 통통하게 피어오른

여름산 구름들이 보기 좋았다.

혹시나 거기엔 주민증처럼 다른 중요한 물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곳에 영원히 박제되기 전에 함께 나오면 좋으련만...

백미러로 힐끔 본 할미는 잔뜩 심란한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할머니댁에 도착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주민등록증 찾기에 매몰된 할미가

이번에는 열쇠도 깜빡 놓고 왔다고 했다.

주민증이 있었으면 열쇠가 필요 없고

열쇠가 있으면 주민증을 찾을 수 있겠지만,

서로가 있어야 할 곳에 없을 뿐이다.

원래 환장할 일은 연이어 몰려온다.


나는 운전석에서 2층 현관문을 바라보며,

구부린 철사로 열쇠구멍을 도르락 만져대는 빌어먹을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내게 그럴 능력은 없다.

 결국 계단 위로 걸쳐진 창문을 넘어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예로부터 할머니의 문단속은 빈틈이 없었다.

외출할 때마다 문이란 문은 김민재처럼 걸어 잠그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사를 위해 안에서 밖으로 물건을 빼내던 창문은

다행히도 잠겨 있지 않았다.

옆집 아주머니가 창문 여는 소리에 놀라 누구냐며 뛰어나왔다.

나는 계단 밑으로 구르지 않기 위해 창문 위로 힘주어 뛰어올랐고,

그 사이 할미는 옆집 아줌마를 진정시켰다.

빈집에 허락 없이 들어온 내가 잘못을 저지른 착각이 일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어 할머니를 들이고 주민증이 숨겨진 곳을 물어봤다.

할머니는 끙끙대며 바닥을 살폈고,

옆집 아줌마와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별게 다 묘한 긴장감이었다.

할미가 안방을 들어가기 전 위치의 장판을 걷어내자,

곱게 접은 티슈안에 신분을 감춘 그것이 드러났다.


옆집 아주머니에게서 "아!" 외마디 탄성이 나왔다. 박수도 쳐주셨다.

난 '어느 벽지를 뜯었더니 눈부신 금괴가 나타났더라'

같은 거면 모를까 박수는 칠 수 없었다.

옆집 아줌마는 아무튼 신기한 할머니라면서,

집주인에게는 잘 설명하겠다는 말과 함께 한 번 배웅을 해주셨다.


이게 뭐라고 홀가분하다는 내 말에

할머니는 "미안혀, 미안혀, 증말 미안혀, 내가 디져야 끝나는 거여"

라고는 했지만 목소리는 신나 있었다.

아무쪼록 다행이고 한시름 놓았다는 말을

왜 그렇게 투박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파주로 다시 돌아오니 오전 9시,

아마 지금까지도 푹 자고 있었을 시간이다.

우리는 이왕 깨어있는 거 못다 한 짐정리를 하기로 했다.

나는 빈 박스들을 버리고

이제는 두 개가 된 각각의 냉장고 안을 정리 후,

바리바리 싸 온 그릇들을 수납하고 지저분해진 바닥을 청소했다.

할머니는 옷장에 정리할 것과

세탁해야 될 옷들을 추리고 있었다.

얼마 후 옷방에서 훌찌럭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서 할미가 울고 있었다.

두 손에 든 하얀 피케이 티셔츠에 얼룩이 졌기 때문이란다.


"아끼는 옷인디 노란 물이 들었어... 이게 내 인생 같어서..."


난 할미가 아낀다는 저 피케이티셔츠를 기억한다.

여느 때처럼 할머니를 보러 간 2010년경,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와있던 할머니가 입은 옷이었다.

버스 뒷문으로 내리는 나를 환히 웃으며 반겨줄 때 봤던

할머니의 하얀 피케이티셔츠.

그날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당신이 좋아하는 추어탕집에 데려갔다.

추어탕을 한 번도 안 먹어본 나에게

갈탕 하나, 추어튀김을 시켜주고는 후회 말고 먹으라 했다.

나는 깻잎에 돌돌 감긴 노릇한 추어튀김과

뜨끈한 추어탕이 입맛에 맞았다.

그 후로 우리에게 추어탕이 최애 메뉴 중 하나가 되었던 그날.

나랑 손 붙잡고 걷는 지금이 행복하다 말하던,

고마운 할머니의 그때 그 피케이티셔츠.

옷에는 노란 물이 들었지만,

내게 바래지 않을 그 기억은 택을 떼지 않은 새 옷처럼 환하다.


후론 번도 보지 못했던

짐상자 속 얼룩진 티셔츠 하나가 할미를 울렸다.

그저 물처럼 시간이 야속하게 흘렀을 뿐,

할머니가 그리고 우리가 얼룩이 진 건 아니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할머니 등을 쓰다듬었다.

어릴 적 잠 못 드는 내 등을 쓰다듬던 할머니처럼

나도 할미를 따스히 보듬고 싶었다.




할미,

슬픔이 더께처럼 쌓여 울고 싶으면 눈물로 씻겨내자.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얼룩이 진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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