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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석 Jun 10. 2024

그땐 몰랐던 일들

사랑을 받아도 울었고 울었다

나는 다섯 식구의 막내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결혼한 부모님은 나랑 네 살 터울의 형을 낳았고,

할머니에게 육아를 부탁하며 정신없이 맞벌이에 나섰다.

와중에 둘째는 갖지 않겠다던 부모님의 계획이 수정됐다.

두 분의 금실 좋은 뜨밤 덕에 나는 예정에 없던 탄생의 기쁨을 누렸다.


일찍이 할아버지와 갈라섰다는 할미는

이후 홀로 외아들을 키우다 며느리를 만나고,

다시금 손자 둘을 키우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할미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늘 집안에 상주해 있는 할머니 덕에,

 부모님의 육아 테트리스는 한결 수월해졌다.

덕분에 형과 나는 할머니의 주된 양육을 받으며 건강히 자랐다.

나는 대부분 그렇듯 천방지축 밝은 막내였다.

다만 그 해맑음은 할머니의 매운맛 훈육을 경험하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럴싸한 장난을 꿈꾼다.
할머니에게 처맞기 전에는.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목청도 크고 기운 센 젊은 시절 할미는 나에게 엄했다.

가족이 출근과 등교로 비워진 집에

할미와 나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가 수놓는 말썽은 다채로웠다.

잠시 그때로 돌아가 몇 가지 에피소드를 떠올려봤다.




EP 1.

보통 빈병을 모아 가게로 가져가 돈을 받아오거나

맛있는 걸 사 먹는 아이들과는 달리,

나는 동네 친구들과 빈병들을 구해와 잘게 부숴

동네 바닥에 흩뿌려놓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우리 땅이야."


당시의 내 사유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이해하려 할수록 더욱 화를 불렀을 그 짓은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차가 정리했고,

나는 호출받은 할머니와 뿌려놓은 유리조각을 얌전히 치웠다.

그리고는 빈병이 조각나듯 맞았다.


EP 2.

여느 때처럼 단둘 이만 있던 아침.

마실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며 

아침정보 프로그램을 멀뚱히 보던 나는

누군가 누른 인터폰을 받았다.

인터폰에서는 내 또래의 음성이 들렸다.

저항감 없이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준 나,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온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이 둘이었다.

지금도 미스터리지만 동네에서 보지 못했던 낯선 친구들을

나는 익숙한 듯 집안으로 들였다.


나는 새 친구들에게 거실도 보여주고 방도 소개해주고

냉장고도 열어젖혀 보여줬다.

아이들은 썩 재미가 없었는지 거실에 있는 어항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매일 심부름처럼 먹이를 주던

대여섯 마리의 금붕어가 놀고 있는 꽤나 큰 어항이었다.

친구들은 어항 안으로 허락 없이 손을 넣어

금붕어들의 안녕을 침범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야!!!!" 힘주어 큰소리를 냈다.

뒤이어 멈칫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숟가락으로 퍼야지"


나는 그들에게 숟가락 하나씩을 쥐어주고

사이좋게 낄낄대며 어항 속 금붕어들을 퍼냈다.

거실이 물로 흥건해질 즈음,

친구들은 만난 지 1시간도 채 되기 전에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때서야 덜컥 겁을 먹은 나는 이대로 집에 가면 어떡하냐며 울었다.

나는 냉정하게 집을 빠져나간 아이들의 뒷모습과

물바다가 된 거실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그 사이 아침 정보프로그램은 끝이 났고,

나는 삐- 소리가 나는 컬러바만 바라보며 소파에 엎어져 있었다.


잠시 후 마실에서 돌아온 할미는

"우리 손주 잘 놀고 있었냐"며 친절히 나의 안부를 물어봐줬다.

나는 "응"이라고 답한 후 최선을 다해 맞았다.


* 그 후 일부 금붕어들의 행방을 찾지 못한 할머니는 내게

혼내지 않을 테니 금붕어를 먹었냐고 물었다.

그랬다면 병원을 가야 할 일이니까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절대 금붕어를 먹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 끔찍한 일은 하지 않았다)

아랫집 이웃과 가족이 회의까지 할 만큼 꽤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내게 파주에서도 물었다.

그 사라진 금붕어들을 먹었냐고... (제발 좀 믿어)


EP 3.

나는 미취학 아동일 때 파출소를 몇 번 드나든 적이 있다.

매번 크고 작은 말썽을 치던 때라 외출금지를 당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집 앞으로 찾아온 친구들의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내내 집에만 있어야 했던 나는

할미의 친구 분들이 놀러 올 때마다

혼란을 틈타 지루한 집으로부터 빠져나왔다.


플라스틱 야구배트 등을 챙겨서 할미의 시선으로부터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멀리 달아나 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의 히죽대던 얼굴은 동네로부터 집으로부터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점점 돌아가야 할 길을 잃어가며 웃음기가 빠졌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던 시절, 나는 겁에 질려 목놓아 울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분들은 나의 집을 물어봐주고 파출소에도 데려가줬다.

그때마다 나는 할미에게 미리 학습된 집 전화번호를 줄줄 읊었다.

 "425에 2490이에요"라고.

(지금은 결번이 된 번호다)

그렇게 파출소에서 안정을 찾고 잠에 들면

얼마 후 할머니가 찾아와 나를 데려가곤 했다.

이런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맞지 않았다.


* 나중에 할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파출소로 들어온 나는 크게 울며 부추전을 해달라고 했다 한다.

홍역을 앓았던 내게 먹이면 좋을 음식을 수소문하던 아버지가

부추를 먹이면 좋다는 친구의 말에 부추전을 해준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내게는 위험신호에 먹어야 할 음식으로 각인됐나 보다.

경찰 여러분에게 죄송하다.




이외에도 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계속 읽다가는 성악설을 믿게 되실 것 같아 그만해야겠다.


그때는 지금 정의하는 핵개인의 시대가 아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되는

혹은 자처하는 일들이 더욱 만연했던 시절 같다.

어린 나에게 따끔한 맘스터치를 행사하던

할미의 나이가 갓 50을 넘겼을 때였다.

100 시대인 지금이야 40~50대가 반백살일 뿐이라 한창나이지만,

평균수명이 60대였던 당시에는 환갑잔치도 큰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내가 초6일 때 분홍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의 환갑잔치는 성대했다.)


평균수명이라는 허들을 향해 가까이 달려가던 할미에게

독박에 가까운 손자 둘의 육아라니,

여전히 사회적으로 유망한 현시대 중년이라 해도 버거울 역할이다.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로 퉁치기에는

이래저래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 같다.

눈치를 제법 볼 줄 알았던 그때의 나는 할미의 한숨을 자주 들었다.


당시의 내 정서로는 이해할리 없던 할미의 투박함은,

지금 돌이켜보니 희생과 헌신으로 인한 힘겨움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손자들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고 아프면 들쳐업고 병원에 가고

형제의 학교에 학부모 역할까지 해낸 할미에게 나는 늘 감사함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는 자주 울었다.

혼나서 울고 마음에 들지 않아 울고 원하는 게 있어 또 울었다.

한 번은 울다가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울다 지쳐 잠들었다는 것에 놀라 마저 울 정도였다.


대체 뭐가 속상한지 누군가 물어봐줬으면 풀렸을 응석 같았는데

나는 그 서운함이 해소되지 않을 때마다 울었고,

그런 나를 보는 할미는 속상한 마음을 당신만의 훈육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고집스럽게,

할미의 무거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눈물만 뿌렸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매콤한 맘스터치는

내가 중학생이 된 후로 맛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전처럼 꾸짖거나 혼내지 않았다.

할미는 내게 그 시절을 자주 이야기했다.

어린 나를 올바르게 세우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게 두고두고 미안하다고.

근데 너는 형과 달리 고집도 그런 센 고집이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이따금 할미가 들려주는

속수무책이던 내 어린 시절 이야기가 묘하게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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