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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석 Dec 05. 2024

그대 먼 곳만 보네요

(이렇게 섭섭한)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새 공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꿔나가던 할미에게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 속 좁은 내 기준,

내 시점으로 바라보는 문제일지 모른다.


우선 집기들이 점점 망가져가기 시작했다.

빨랫감을 널기 위한 접이식 행거는,

접는 법을 모르는 할미의 손에 의해

여러 군데의 봉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봉들을 홈에다 공들여 끼워봤지만,

한번 탈출한 봉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물론 망가진 행거는 또 하나 사면 되니 이해 가능했고,

앞으로는 내가 할 테니 괜히 힘들게 접지 마시라는

꽤나 자상한 면모도 잊지 않았다.


할미 마음 같지 않던 행거의 최후


다음은 갈 곳 잃은 냄비받침 참사가 벌어졌다.

본가에서 갖다 준 제육볶음도 해 먹고 고사리도 볶아먹던 할미는,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을 냄비받침 없이 여기저기 내려둔 모양이다.

덕분에 놀란 싱크대 대리석은 순식간에 금이 가며 뜨거운 안녕을 고했고,

그 틈으로 물이 새며 밑에 있던 서랍장을 축축하게 적셨다.

원목의 거실 테이블도 정확히 프라이팬 모양으로 열이 받으며

동그랗게 흔적을 남겼다.  

나 역시 뜨겁게 열이 받았으나 화를 식히고,

금이 간 대리석에는 임시로 방수 테이프를 붙이고

거실 테이블은 별 수가 없어 그냥 두었다.


조금 더 모양을 만들면 감각적인 패턴이 될지도..


우리 할머니 짬바만큼이나 나이도 같이 늘었는데,

깜빡깜빡하는 실수까지 어떻게 막겠어 싶었다.

어쩌면 먼 미래의 내 모습 아니겠는가.

하지만 할미가 주기적으로 해오던 염색약은

조카가 왔다 갔나 싶을 만큼 화장실 여기저기에 묻어

지워질 생각을 거부했고,

냉동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바닥에 물이 흥건해져서

닦고 말리느라 애를 먹은 것까지는 내 계획에 없었다.


당신의 집에서 살림살이를 척척 능숙하게 주무르던 할미 자신도

적응이 필요한 이곳에서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더딘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었다.




할미의 버거운 새집 적응기에

기가지니도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사람 봐가면서 오작동해야 하는 당시의 기가지니는,

느닷없이 야심한 새벽 "네?"라고 묻지도 않은 답으로

할미를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누구유!"라고 되물은 할미에게

기가지니 속 그녀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로 응수하며,

왠지 예상했어도 소름 끼치는 클리셰를 만들었다.

할미에게는 별게 다 어찌해야 될지 모를 것 투성이었고,

기가지니도 그런 할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원래가 익숙하고 편했던 80대 할미에게

그 이상 더 학습해야 될 것들이 필요했을까?

이미 지금도 그녀는 충분히 피로했을 것 같다.


여기까지는 할미가 미처 몰랐거나 서툴러서

혹은 깜빡해서 벌어진 일들이라 짐작했는데,

애초에 내 인내와 배려는 총량이 부족했었나 보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들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한여름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할미는 거실 창문을 모기장까지 활짝 열고

집안에 들일 수 있는 모든 벌레들을 소환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가정집은 'NO BUG ZONE'이다.

하지만 빛을 찾아 신나게 날아온 나방들 모기들도

그 외 이름 모를 벌레들까지 모두

우리 집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눌러놓고 미뤄두었던 나의 잔소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할미 혼자 지낼 때는 그렇게 잘 단속하던 창문들을

어째서 모기장까지 열어놓았냐고,

누구보다 그럴 리 없는 할미에게 원망 섞인 푸념을 던졌다.

할미에게서 이게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니 좋다고,

몇 마리 들어오지도 않아 괜찮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우리 집 에어컨과 선풍기들을 한 번씩 바라봤다.

다들 한 마디씩 거들어줄 수는 없는 걸까?

그러고 나서 바람 따라 벌레는 안 들어오냐고 맞받아친 나는,

아무도 듣지 않길 다행이라 여겼다. 정말 유치한 반박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모기장을 닫은 후부터 1시간 가까이

"여기도 모기새끼 있다!!!"고 소리치면서

불러낸 손님들을 손바닥으로 인정 없이 후려치고 다녔다.

나는 뭔지 모를 약이 올랐다.


어느덧 마흔을 앞둔 손자가

수십 년 만에 할미와 한집에서 다시 산다는 건,

어쩌면 대립할  아닌 것들까지 문제 삼아야 될 만큼

유난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퇴근 후 지끈한 머리가 더 조여 오고 있었다.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로

싹퉁머리 없이 열을 내나 싶은 자책도 일었다.


그래도 그렇지,

할미 참 먼 곳만 보네요.

(이렇게 섭섭한)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어릴 때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만들던 나에게,

할미는 말질 좀 그만하라고 다그쳤다.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말질'이 참 특이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쨌거나 이제 나는 할미의 말질을 단속해야 되는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뒤 할미의 묵직한 말질 하나가 추가됐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연 나에게 수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탄내가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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