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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석 Dec 12. 2024

불, 같이 화냈던 우리

불낸 자가 열받은 건에 대하여

"난 코가 맥혀서 몰러몰러..."


분명 모른척하는 할미가 혼자 있는 동안 무슨 일을 벌인 게 분명하다.

내가 이 집에서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종이류를 태웠을 때의 냄새가 집안 가득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할미는 껄끄러운 표정연기로

'탄내가? 여기서?'같은 시치미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뭔가 확실히 잘못됨을 느낀 나는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을린 자국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특정한 범인은 8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그녀.

물증만 거머쥐면 되는 이 순간,

할미는 대체 어디에서 불장난을 했을까.

태운 것은 무엇이고 왜 태워야만 했는가.

화장실? 아니었다.

모든 방에도 탄 것이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내 탐문수사를 졸졸 따라다니던 할미는,

마침내 주방 앞에서 살살 운을 띄웠다.


"하여튼 차암 너는 아니라니께 왜 말을 안 듣냐아..

별 거 아녀어~~!!"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한국말 중 으뜸인 것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거나

끝났어도 다르게 해석되는 충청도 말씨라 생각한다.

압박하며 좁혀지는 수사망에 대처하는

저 현란하지만 모순된 언어의 드리블러.

아니다가 '별 거 아니다의 그 아니'라니...

구회말 투아웃 패배 위기에 놓인 할미는,

어떤 알리바이로 담장을 넘기는 반전의 스윙을 노릴까.


"내가 자네 신경 쓸까 봐 말을 못 한겨.."


할미는 종종 범석아, 손주, 도련님, 자네 중

변명거리가 있을 때 자네라는 호칭을 골라 집는다.

그렇게 높이 뜬 공을 쳐 아웃된 할미가

내게 가리킨 곳은 싱크대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싱크대 안쪽은,

한바탕 무언가를 태운 뒤 검디 검게 그을러 있었다.

영화 속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범행 일체를 역순으로 떠올리는 베테랑 프로파일러도,

우리 집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면

"아.. 어르신... 안 돼!!!"라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가만히 보다 못한 내 손이 철 수세미를 집어 문질러봤지만,

쉽게 지워질 리가 없었다.

대체 뭘 태웠는지 물어볼 여유 역시 없었다.

나는 지워지지 않을 것을 박박박 짜증스럽게 닦아내며,

앞다퉈 나오려는 입밖의 말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있는 거라도 잘 아껴 써야지. 왜 멀쩡한 걸 하나씩 다 망가뜨려놔?"


나는 불이라도 났음 어쩔뻔했나,

여기서 태울 게 뭐가 있길래 위험하게... 어쩌고 저쩌고를 늘어놓고,

말미에 답이 없을 질문을 했다.


할미의 한숨이 점점 불규칙해졌다.

누군가 잘못했어도 잘못하지 않았고

또 누군가의 바른말이 닿지 않는 말싸움이 있다.

가끔은 논리, 상식 따위의 재료가

상대의 감정을 알아채고 달래는데 도움이 못 된다.

누가 누구에게 원인을 제공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끝내 알고는 있지만 서로의 감정은 상하고,

결국 승자 없는 난장은 시작된다.


할미는 휙 돌아서서 안방 문을 부서지도록 닫고 그 안에서 소리쳤다.


"으른이 필요 없는 것들 좀 태웠기로서니!

어쨌어요 저쨌어요 지청구를 맥이고!"


뒤이어 나한테 왜 이러냐고,

자길 이 집에서 쫓아내려 한다고,

돼먹지 못한 놈이라며 분노했다.

잠시 후 그녀는 안방에서 나와

이동하는 동안 한차례 목청을 높이고,

서재방 문도 쾅 닫으며 또 한바탕 맹공을 퍼부었다.

집안 자체가 할미의 모노드라마를 위해 지어진

정교한 세트장 같았다.

방마다 다른 챕터의 대사가 있는 것처럼

식을 줄 모르는 고함은 계속됐다.

오히려 나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할미는 자꾸만 왜 당신을 못 살게 구냐고 다그쳤다.




난 출근길 옷차림 그대로

그녀의 대사를 온전히 받아내는 관객이 된 채,

얼굴에 열감이 돌고 가슴이 두근대는 감정을 느꼈다.

마치 공들인 것이 균형감을 잃고

한 폭 주저앉아버린 느낌도 들었다.

할미의 닫힌 방문 틈으로 삐져나와 탄내를 가르는

날카로운 언성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이러한 할미의 말들이

스스로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을

뒤틀리게 표출하는 신호인 줄 안다.

그리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해독이 가능한 할미의 언어들이라 믿는다.

그래도 마음은 불편하게 넘실댔고 아팠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 여유를 잃고

좋은 게 좋은 것을 망각한 손자를 기다리는 건,

싱크대를 태워먹은 할미의 불같은 역습뿐이었다.


나는 집 근처 호수공원을 향하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어찌 됐든 되려 혼나고 있는 몸이라 괜히 힘아리도 없어졌다.

수년째 거의 매일 호수공원을 걷는 루틴이 생겼는데,

오늘은 마음을 가라앉힐 명분으로 나간다.

2층인 우리 집은 밖에서도 할머니 음성이 들렸다.

아마도 내가 나온 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원래는 조용한 1인가구였는데,

이제 전체 동에서 사람 사는 티 내는 게 제일가는 집이 되었다.

오늘 저 집에서 자욱한 연기가 난다고 신고해 주는 이웃은 없었지만...


초가을이었다.

놀라운 사계를 선물해 주는

늘 한결같은 호수공원 앞에서

365일 중 별일 없는 게 대부분, 기쁠 때 며칠, 슬플 때 며칠인 가운데

결국 때마다 변하는 건 나였다.

언제나 그렇게 걸어내고 비워내며 정리하고 충전했다.

세 바퀴 정도 돌고 나니,

사연 많을 것 같은 가을남자에게서

땀이 나고 마음은 가라앉았다.




그토록 시끄럽던 집안도 고요한 밤을 맞았다.

괜히 발소리도 조심하게 되던 현관을 벗어나니,

주방 식탁에 500ml 카스 한 캔과 땅콩 그릇이 놓여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나머지 두 캔도 보였다.

거무튀튀한 싱크대 안에는 할미가 비운

찌그러진 맥주캔 하나가 먼저 들어가 있었다.

방에서 누워있던 누그러진 할미가 나와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O형이라 성격이 불같고 아쌀하잖여.

이제 두말할 것도 없는겨.

한잔 따악 마시고 자거라. 이?

고마와~~~"


사실 할미는 A형이란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지만,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맥주 캔을 땄다.

미안하다는 말은 쑥스럽고

고맙다는 말이 덜 낯간지러운 사이.

깊이 사랑하지만 말로는 삼키고 사는

엉망진창 뒤죽박죽인 할미와 나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시간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이대로 붙어살며 수많은 일을 겪게 될 거다.


어쩌면 버티던 방문짝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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