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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석 Dec 02. 2024

서운하지 않을 만큼의 역할

모양을 띄어가는 우리의 일상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공간에서 지내는 할미의 일상은 무료해 보였다.

한창 새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던 나는 분주했고, 

내가 없는 동안의 할머니는 온전히 혼자였다.


신기하고도 다행인 것은,

우리 집, 부모님의 집, 

결혼 후 나름의 대가족이 된 형 내외의 집.

이렇게 세 집간의 거리가 차로 반경 5km를 넘지 않았다. 

지도에서 그리면 정확히 삼각형이 그려질 만큼.

덕분에 내가 일터에 있는 동안 돌발상황이 생기면,

여기 괴고 저기 받치며 가족 간의 할머니 케어가 수월할 듯싶었다.


전처럼 할미가 혼자일 때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고 느껴 모셔왔으니,

내가 부재할 때의 할미도 문제없이 챙겨야 했다.

또 집전화가 익숙해 벽돌이 된 할미의 낡은 휴대폰 대신,

새 폰을 들여와 급히 연락할 때를 대비하기도 했다.

1번을 꾹 누르면 내 번호, 2번은 아들 번호 같은 식으로.


부모님은 할미와 나의 반찬거리를 만들어 열심히 날랐고,

형이 데려온 쌍둥이 증손자들은

왕할머니 앞에서 날라다니며 요란하게 재롱을 피웠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자,

할미는 거실 창문을 벌컥 열고


"어디 가셔!!!! 이이~ 그류? 루주 바른 거 보니께 나 몰래 애인 만나는 줄 알았지!"


이렇게 언제 사귄 지 모를 친구에게 충청도 재질의 안부를 묻는 걸 보니,

조금씩 파주살이에 적응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엔 막연하고 막막했던 동거가

어찌저찌 형태를 둥그렇게 만들고 순환하고 있었다.




가족 간 한집에 살다 보면 각자의 역할이란 게 나뉘기 마련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그런 역할이랄 건 딱히 없었다.

살림 전반을 책임져온 혼자인 나에서 둘이 되었을 뿐,

할미는 그저 살도 좀 붙고 맛있는 거 먹고 온전히 평온하면 됐다.


그럼에도 그녀는 두 가지 역할을 자처했다.

그중 하나는 나에게 차려주는 밥을 신경 썼다.

할미 당신과 사는 사람은 나. 나는 손자. 손자면 이 할미가 밥을 챙겨야지.

대략 이런 흐름이다.

오래전 함께 살 때도, 따로 살 때도

늘 할미는 나의 끼니에 충실했다.

할미 집에 놀러 갈 때면

밑이 깊은 고봉 밥그릇이 수건에 둘둘 말아져 

따끈한 이불 속에 들어가 밥을 데우고 있었다.

그때마다 할미는 식을까 걱정하던 따뜻하고 수북한 쌀밥과 함께

감자부침, 두부부침, 동태찌개, 고등어조림 등등의 메뉴를 만들어줬다.

나는 내가 애정하는 음식들을 상차림해 내어주는 할미의 그 행위들에 

확실한 안정감과 아껴지고 있다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니 내게 "뭐라도 잘 먹어라"를 수십 년간 입에 달고 살아온 할미에게,

손자 밥 먹이기는 말린다고 그만둘 영역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대체로 아침을 먹지 않는 나였지만,

밥이 넘어가지 않아 거르는 날이면 서운한 기색을 보이는 할미였기에

되도록 챙겨 먹으려 노력했다.



어릴 적 할미가 소쿠리 가득 담아줬던 내 소울푸드


할미의 여전한 솜씨, 감자 부침




나머지 하나는 청소였다.

나는 혼자 살아보고서야

나름 스스로 집정리를 잘하고 사는 인간이구나 싶었는데,

식구가 한 명 늘었을 뿐인데도 청소거리는 3배로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눈도 시원찮게 보이는 할미는

아침마다 온 집안을 빗질로 쓸고 닦으며 잠이 덜 깬 나에게,


"여여~ 이것 좀 봐라! 청소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시커먼 거!

어디서 이런 먼지들이 노상 나오는겨!"


그때마다 나는 "세상에!" "미친...! 진짜?"같은 추임새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 내 눈엔 집안의 치워야 할 구석구석 들키지 않은 먼지들이 많이 보였지만,

원래 하던 방식대로 청소라도 할라치면 이 역시 할미는 못 마땅한 눈치였다.

그때마다 눈가가 새초롬해지면서 방으로 들어가 한숨과 함께 눕든가 하는 식이었다.

할미 마음의 행간을 읽는다는 건 겪지 않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하자면 '내 청소가 마음에 안 드냐'는 뜻의 몸짓이다.


하루는 패브릭 소파의 커버를 벗겨 세탁하려는데,

할미가 주변을 안절부절 떠나지 못하는 게 보였다.

커버를 뜯으려는 순간 그 밑으로는 통장과 도장 같은 비닐뭉치가 잠들어 있었다.

마치 섣불리 알아서도 안되고 함부로 정리해서도 안 되는

할미만의 보석함이 집 군데군데 만들어졌고,

그때마다 내 손길이 닿으면 서로가 겸연쩍어지는 일종의 룰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대략 두어 달 정도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부터


"이날은 쉬는 날이니까 청소 한 번 해야겠다. 할미가 워낙 청소를 잘해서 뭐 치울 게 있겠냐만!"


같이 할미의 마음 먼저 달래는 예고도 잊지 않으며..




그렇게 집안 곳곳 할미의 살림력이 더해갈 때쯤,

우리에게 예상치 못했던 특이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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