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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상담가도 최면상담을 받나요?

자기 최면 vs타인최면

by Lyden

일상에서 가끔(진짜 아주 가끔) 나를 최면가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그리고 자주 묻는 질문이 "그럼 만약에 평소에 고민이 있거나 할 때 자기최면을 하시나요?"이다. 아무래도 최면이라는 도구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가 무언가 마법처럼 자기암시만 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가 있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힘든 일이 있거나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경우에는 최면상담가도 다른 상담가에게 최면상담을 받는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최면이라는 도구로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도록 도울 수 있는 최면가라면,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최면과 타인최면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타인최면은 예를 들면 외과수술과도 같다. 우리가 몸속에 종양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이 종양은 우리 몸 안에서 지속적으로 통증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약도 먹어보고, 종양을 약화시키는데 좋다는 음식도 찾아 먹어보지만, 일시적으로만 효과가 있을 뿐 종양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고통 역시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뭘까? 당장은 조금 아프더라도 직접 몸을 갈라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종양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사람은 두 번 다시 그 종양이 만들어 내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때 수술은 의사가 집도한다. 그렇지만 의사가 수술을 집도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자기 몸에 마취를 하고 직접 칼을 대어 종양을 떼어낼 수는 없는 법이다. 최면도 마찬가지다. 최면상담은 기본적으로 트랜스상태를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트랜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효과가 강력해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트랜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최면에서 '크리티컬 팩터'라고 부르는 '비판적 사고'가 작동을 중지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튕겨내는 사고 작용이다. 그래서 이 비판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으면, 암시를 넣어도 암시가 들어가지 않거나 들어간다 해도 얕은 수준에서 들어간다. 그렇기에 그 효과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무의식)의 기능이다. 최면세션은 트랜스를 유도하고 그 모든 과정 중에 의식이 '쉬게'함으로써(사라지는 것 아님) 이 비판적 사고 역시 쉴 수 있게 만든다. 그 결과, 내담자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이 떠오르고 내담자는 그 무의식 속의 자원들을 경험되게 된다. 나아가 이렇게 비판적 사고가 쉬고 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내담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통찰들이나 최면가의 제안(암시)들이 내담자에게 보다 수월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이런 세션을 할 경우, 세션을 안내하는 '나'와 세션을 받는 '내'가 나누어지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세션을 받는 '나'는 의식적으로 상황을 확인하고 체크하고 다음에 안내할 지점을 판단하게 된다. 이 순간 '의식'이 작동하면서 무의식 내에서의 작업이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구조상의 문제에 의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최면은 그 형태는 따라 할 수 있어도 타인에게 세션을 받는 것보다는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최면을 할 때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원리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완전히 '받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는 없기에, 직접 받기만 하면 되는 세션보다 그 효과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거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최면상담가라도 같은 최면상담가에게 세션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최면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타인에게 받는 최면상담이 '외과수술'이라면 자기최면은 수술 이후의 '체질개선'과도 같다. 우리가 수술을 받아 종양을 제거하고 난 뒤에도, 다른 자리에 다른 종양이 생길 수는 있다. 또한 그렇게 종양을 잘라냈지만 그 자리에서 새로운 종양이 자라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수술 이후에도 몸에 좋은 것들을 먹으며 생활습관을 개선해 다시 병이 생기지 않도록 면역력을 올리는 절차를 밟는다. 자기최면은 이런 것과 같다.


즉, 특정한 원인이 문제를 야기하기 전에=종양이 되기 전에, 미리미리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기 때문에 이때는 외과수술을 할 때만큼 마취가=트랜스가 깊게 확보되지 않아도 괜찮다. 또한 자기최면은 이렇듯 깊게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에, 언제든지 시간이 날 때 편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깊은 트랜스를 확보하고 유지하기가 힘든 만큼(사실 깊이 확보는 가능하나, 스스로를 안내하는 과정에서 상태가 지속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게 문제이다.) 상대적으로 덜 깊은 수준까지만 확보해도 되고, 그만큼 접근하기가 쉬운 것이다.


이는 마치 약물치료에도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병을 치료할 때 확실한 방법은, 그 병의 원인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약물로도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하다면 우선 약물치료부터 하고 보는 것처럼, 자기최면으로 문제의 심층적인 뿌리 부분을 도려내어 문제를 완전히 중화시키기는 어려우나, 그 뿌리 위의 병든 잎과 가지를 쳐내는 작업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전제되면, 수술을 하게 되더라도 문제를 약화시키고 들어가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또한 수술 이후에는 위에 언급한 사후관리에 해당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최면 역시 타인최면과 보완적으로 쓰일 수 있는 유용한 기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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