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왠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딱히 아무 문제없는 것 같은데도 공허한 사람도 있고, 공허함 자체가 너무도 큰 문제로 느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공허함을 회피하기 위해, 자극적인 것을 쫒으며 나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것들에 중독되듯이 몰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자극적인 것도 익숙해지게 되고, 나에게 더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늘 외부의 무언가가 나의 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알아서 채워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스스로도 자신 바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거든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삶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해도, 늘 그것이 끝나면 마음은 다시 허해졌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던 적도 있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에게 단기적인 쾌락을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유튜브의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소비하며, 무언가 나의 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콘텐츠가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쇼츠 스크롤을 주야장천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극적인 것들이 마음을 채워주는 것도 한 순간뿐, 자극적인 음식들을 다 먹고 나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나면, 오히려 공허한 느낌은 더 커져갔습니다.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고,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이 공허함을 회피하기 위해 즐겁지도 않은데 일에 몰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 중독처럼요.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공허감의 이유가 궁금했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알아냈습니다. 공허감이 존재하는 이유와 해결방법을 말이죠. 먼저, 공허감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허감이란 무언가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구멍이 뚫린 것 같다는 말은,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허망한 공허감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비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무언가가 텅 빈 느낌이 든다는 말은, 거기에 무언가 느껴져야 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느낌’이 부재한 것이죠. 즉, 느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느낌’은 왜 사라진 걸까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느낌’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즉, ‘내가 느끼는 나의 느낌’이죠. 이것을 조금 고상한 용어로는 ‘실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을 의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 사람은 실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강렬한 주관적인 느낌과 함께하기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인간, 특히나 현대인들은 실존하기가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준은 보편적인 것이고 대중적인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네 맘대로 하지 말아라”라고.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숨기고 억압하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되는 것은 안 좋은 것이라고 배웠고, 약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외부는 우리의 감정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거죠. 그런 문화에서 그렇게 학습하며 살아온 겁니다.
간혹 가다 감정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좋은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부로 드러난 감정은 ‘판단과 평가’의 대상이 되거든요. 유튜브 댓글만 봐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어떤 콘텐츠에 대해, 그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느낌을 표현했을 뿐인데 엄청난 비판과 인신공격이 날아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이제 와서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 되었습니다. 기꺼이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이 존재하도록 허용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즉 기꺼이 상처받을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외부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외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관적인 느낌’은 ‘실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타인의 평가는 어느새 나의 내부로 스며들어 내가 나의 주관적인 느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기준이 됩니다. 끊임없이 나의 어떠한 부분은 외면당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외면이 계속 쌓이다 보면 그렇게 자주 외면된 부분, 존재하도록 허용되지 않은 부분은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마음에 ‘느낄 수 없게 된 부분’이 생겨나는 겁니다.
또한, 이러한 ‘외면’이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에 자신의 주관적인 무언가(생각, 느낌, 감정)가 아주 충격적으로 부정당했거나, 상대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더라도 어린아이였던 그때의 내가 아주 강렬히 부정당했다고 느꼈다면, 그 부분은 이후에 허용돼서는 안 되는 ‘주관적 느낌’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립니다."
실제로 우리가 외면한 느낌은 외면당했을 뿐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즉, 거기에 있는데 더 이상 느끼지 않으려다 보니까 ‘있는데 느끼지 못하는’ ‘느껴지는 아무것도 없는 느낌(공허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를 조금 고상한 용어로 표현하면 ‘실존적 공허’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커니즘을 공허감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깨닫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리고 알았다고 해도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지는 당연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음 편에서는 이 공허감을 회복시키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