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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명확하게 설정하지 마세요.

명확해야 하는 건 욕구와 행동전략.

by Lyden

많은 경우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라고 말한다. 더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적어보라거나, 적극적으로 생생하게 목표가 이루어진 장면을 시각화해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목표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방식은 오히려 목표달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목표란 것은 결국, 없는 것이 채워진 나의 상태이다. 그 말인즉슨, 무언가가 이루어진 목표를 구체적으로 상상한다는 건 결국, 나의 현재가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현재의 결핍이 충족된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미래와 그것이 없는 현재의 괴리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현재가 더욱 비참해진다. 또한 그렇게 자신의 현재가 비참해질수록 이 사람은 더욱더 미래에 자신이 무언가를 채워낸 그 순간에 집착하게 된다. 즉, 결핍으로 가득 찬 것 같이 느껴지는 현재를 회피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미래라는 망상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목표가 이루어진 순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적어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함정도 있다. 우리는 익히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뇌가 자극되고, 우리의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해서 미래의 목표가 실현된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을 통해서 실제 그 상태에 대한 뇌 신경망이 발화된다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많이 접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나, 주의해야 할 교묘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성공해서 외국의 아주 멋진 대저택에서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여유롭게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독서도 하면서 그렇게 돈 걱정 없이 아주 여유로운 마인드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쳐보자.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고 매일매일 글로 쓴다. 이것이 효과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상상과 묘사는 어찌 됐든 그 사람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나, 사실 잘 따져보면 위의 구체적 시각화의 결과물은 그 사람이 그 상태에 닿기 위해 무언가를 행한 결과물이다. 즉, 이미 저렇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부자가 된 사람은 그렇게 되기 위한 행동을 했고 '단지' 그 결과로써 저러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이지 방구석에 앉아서 상상만 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위의 시각화나 글쓰기가 그 사람에게 어떠한 동기를 부여해서 움직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 그런 (구체적이기 때문에 더욱 즐거운) 망상의 세계로 도망치게 하는 결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통해 안심을 하게 된 이후에는 안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한다.


시각화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성공한 사람보다 삶이 변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또한 목표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그 목표로부터 발생하는 감정과 감각은 더 생생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것이 나의 현재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무의식 수준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매우 다르다는 걸 무의식 수준에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은 곧, '저건 내가 할 수 없는 거야. 왜냐면 지금의 나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거든.'이라는 메시지가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상상할 때는 즐거웠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려 하면 매우 힘이 들고 '정말로 가능할까?'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걸음에 100m를 뛰려는 마음과도 같다. 우리가 100m 달리기의 결승지점을 통과하는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100m를 한걸음에 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 목표에 대한 적극적 상상과 글쓰기는 마치, '당신이 이것만 하면 100m를 한걸음에 뛸 수 있습니다.'라고 오해하게 만들기 매우 쉽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한 번에 뛸 수 없는 것을 한 번에 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뛰려 하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결과'(한걸음에 100m 뛰기)도 안 나오고 그것 행하는 과정도 매우 힘들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힘은 힘대로 드는데 (내가 바라는) 결과는 안 나오니까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다시피, 어떻게든 의지를 발휘해 행동을 계속해 나간다고 해도 시선이 구체적인 미래에 있게 되는 순간, 나의 현실은, 무언가가 채워진 저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지속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만약 어떻게는 참고 견뎌서 그 목표를 이루어 냈다 할지라도, 이 목표에 대한 충동과 달성은 '현재 나는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해도 결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결핍을 채워줄 또 다른 목표를 찾아 같은 절차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목표를 이루는 것 자체가 현재의 자신이 결핍되었다는 인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성과 명확성이 필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정확히는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욕구'와 '행동전략'이다.


위의, 많은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고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쫓기지 않으며 여유롭게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는 독서를 즐기는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저 사람이 원하는 게 진짜 '돈'이었을까? 물론 당연히 돈을 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돈을 억수로 벌 수 있는데, 하루에 14시간씩 주 6일 일해야 하고 하루라도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돈'이 줄어든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도 과연 저 사람은 "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나는 이렇게 일만 하고 살아도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저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데에는 사실 더 상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많은 경제적 자원을 통해,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 경험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며 그렇게 나 하고 싶은 대로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하위 목표로 '경제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게 진짜 그 사람의 바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상위의 목적(욕구)이 드러나게 되면, 그러한 삶을 위해 꼭 외국의 대저택에서 살아야 할 필요는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도 그렇게 엄청나게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제는 초점이 변화한다.


"과연 내가, 내가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을 하며 즐겁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퍼즐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게 된다. 그 퍼즐들 중에는 지금 당장 놓을 수 있는 퍼즐과, 지금은 놓아도 특정 그림을 완성하기에는 모자란 퍼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분별이 일어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금 당장 놓아서 전체적인 그림(드러난 욕구의 실현)이 완성될 수 있게 돕는 퍼즐 한 조각을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퍼즐을 놓고 나면, 다음에 놓을 수 있는 퍼즐이 보이고 그것을 놓기 위해 행동하고 그 퍼즐을 놓고,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결국 퍼즐은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욕구를 확인하고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주의를 고정하는 전략은 그 사람이 현재를 살아나가게 한다. 이때의 현재는 미래라는 망상으로 도망쳤을 때의 결핍된 현재, 그렇기에 참고 견뎌야 하는 현재가 아니다. 이제 이 사람의 현재는, 나의 욕구를 확인하고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그 에너지가 발산되며 저절로 스스로를 실현해 가게 되는, 욕구가 실현되어 가는 즐거운 삶이다. 주의의 초점이 미래의 목표에서 나의 욕구로 이동한 결과, 고통스럽고 결핍되었던 현재가, 욕구라는 에너지가 발산되어 가며 스스로를 실현해 나가는 즐거운 현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욕구라는 에너지를 타고 현재를 살아간 결과 결국 드러날 미래는, 우리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예측할 수 있었던 인위적인 미래보다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지식소스: 정귀수-에릭소니언 NLP v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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