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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감수성이 낮으면 최면에 잘 안 걸리나요...?

감수성의 시대

by Lyden

최면 상담에 대해 검색하다 보면 최면감수성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그리고 최면감수성이 낮으면 최면에 잘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보인다.

그래서 최면 상담에 관심이 있더라도 쉽게 최면에 접근하지 못한다. 비싼 돈 내고 받았는데 내 최면감수성이 낮아 실망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최면감수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감수성이 메마른 현대사회라지만, 내가 내 돈 내고 심리치유를 받겠다는데 거기에까지 감수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최면감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사실, 최면이라는 도구, 그리고 최면상담가에 대한 '신뢰와 이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과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여러분들은 오늘은 가벼운 여흥으로 최면세션을 체험하러 이곳에 오신 것이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한다.(실제로 최대한 따라 해 보세요! 눈뜨고 하셔도 됩니다.)


"지금부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몸이 점점 편안하게 이완되고 그렇게 몸이 점점 편안하게 이완이 되면 될수록 제 말이 더 잘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한 상황에서 그렇게 축 늘어져있는 당신의 오른쪽 손목이든 왼쪽손목이든 상관이 없으니까요, 손목에 헬륨가스가 가득 든 풍선에 이어져있는 줄이 묶여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마치 그 숨이 그대로 헬륨으로 변해 풍선 속을 가득 채우듯이 풍선이 점점 커지며 더욱더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저 풍선은 계속해서 커질 수 있는 우리의 마음속의 풍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풍선은 점점 커져서 하늘 위로 점점 더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 풍선과 줄로 연결되어있는 당신의 손목도, 점점 그 풍선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 위로 올라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계속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있는 것처럼. 그에 따라 풍선은 여전히 점점 더 커지며 점점 더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담자 앞에서 이런 제안(암시)을 던지면 10명 중 7명은 손이 위로 올라간다. 왜일까?


바로 풍선이 떠오를수록 당연히 줄은 당겨질 것이고 줄이 당겨지면 팔이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호흡이랑 풍선이 사실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과, (실제로는 내가 숨 쉰다 해서 풍선이 커지진 않으므로)

풍선은 영원히 터지지 않고 커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연상은 어디까지나 '즐거움 목적의 최면체험'이라는 상황아래에서 진행되었으며, 중간에 '마음속의 풍선'이라는 표현과 '상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 비판력이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구조를 취했다.


그리고 그렇게 '비판 없이', 이 상상(최면가의 제안)에 내담자 스스로가 '참여'함으로써 내담자는 상상(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정말로 몰입해서 생생하게 상상하면, 그 상상이 담보하는 감각과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즉, 그것은 상상일 뿐이지만, 몰입하고 몰입한 결과 그 상상에 감각과 감정이라는 reality(실제감)가 붙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과 감정은 신체의 생리적인 현상이기에, 실제 운동반응을 일으킨다.


이것을 최면에서는 이데오모터 다이내믹(관념역동반응)이라고 한다. 즉, 리얼한 상상을 통해 실제로 그 상상에 대한 '현실적인' 운동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에 이야기한 비판력에 대한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도, 클라이언트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라고 비판을 시작한다면 위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최면상담가가


"그것을 그냥 여흥을 목적으로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가끔 잠이 들기 전에 우리가 이루고 싶은, 또는 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즐거움 속에 빠져들기도 하잖아요?


그때 우리가 이루고 싶은 모습은 우리의 현재 현실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고 몰입해서 즐길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즐기고 오신다고 생각하시면 돼요."라고 물꼬를 트는 것만으로도 내담자는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것이 어떤 작업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를 함으로써 더 이상 비판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더 이상 비판할 필요가 없어진 내담자는 그 여흥(또는 치유세션)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며 최면현상을 체험할 수 없었던 내담자는 최면현상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최면감수성이란 이런 것이다. 내담자들마다, 상담에 대한 참여도와 신뢰도, 열려있는 정도가 다르다. 처음부터 아주 완전히 열려있는 내담자가 있는가 하면, 비판의식과 두려움에 상담가를 경계하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받고 싶어 찾아오는 내담자분들도 있다.


이때, 열려있는 내담자는 최면가의 인내에 보다 적극적으로 충실하게 임할 것이고, 최면가가 안내하는 내용을 보다 리얼하게 체험할 것이다. 보다 닫혀있는 내담자는 보다 덜 리얼하게 체험하거나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를 겉에서 보면 '누구는 최면감수성이 높아 최면에 잘 들어가고, 누구는 최면감수성이 낮아 최면에 못 들어간다.'라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관측은, 최면을 보다 잘 체험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전적으로 내담자가 최면, 그리고 상담가에게 열려있는가 닫혀있는가 여부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곧 최면과 상담가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최면감수성이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최면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가 최면에 들 수 있으며 최면이라는 기예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리드하는 것이 상담가의 역할일 것이다.


모두가 안심하고 최면이라는 기예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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