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으로 어떻게 내 문제를 치유한다는 거죠?
최면상담으로 클라이언트가 회복되도록 안내할 수 있는 이유 1.
누구나 한 번쯤, 머리로는 더 이상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는데 마음은 그렇게 안되어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을 것이다. 심한 경우, 그 마음의 고통이나 두려움이 너무 강렬하여, 순간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진정된 다음에야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후회하며 자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려 여러 노력을 해보지만 변화가 있다 해도 잠깐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실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를 이 악순환에서 꺼내줄 무언가를 기다리면서도 ‘이것이 내 운명인가...’하고 체념하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공포증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발표공포증, 사람공포증, 더 나아가서는 인간관계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조심하는데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이 왜 발생하는 걸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신적 외상이라는 것이 있다. 외상은 외부로부터 입게 되는 상처를 뜻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입은 외상은 트라우마를 낳는다. 트라우마란 그 외상을 입은 순간에 받은 상처가 그 순간에 해결되지 못해 고착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착된 트라우마는 그 트라우마를 유발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 그 상황(또는 상황의 일부 요소)을 트리거(기폭제)로 하여 현재에 다시 소환된다.
이렇게 과거에 미해결 된 트라우마가 현재에 다시 소환되기에, 이미 지나간 일이고 심지어는 너무 예전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 트라우마에 연결된 기폭제가 건드려지는 순간, 그 트라우마적 반응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게 튀어나와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겠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러한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를 지닌 존재를, 최면상담에서는 ‘파츠’(분아)라고 한다. 본래 충분히 표현되고, 그 고통과 상처, 마음이 존재해도 되는 것이라고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자아에 건강하게 통합되었어야 하는 자신의 일부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분리되어 남겨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일부분은, 개인의 자아에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적인 수준에서 통제되지 않는다. 설령 일시적으로 통제한다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을 하는 것으로 결국, 그 압력이 한계에 치달으면 더욱 거세게 터져 나오게 된다. 또한, 무의식 수준에 존재하는 것인 만큼 의식적으로 분석하여 해소하기 까다롭기도 하다. 그래서 그 결과, 머리로는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겠는데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트라우마를 최면상담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가능하다. 최면상담으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표현-해소-이해-납득-변화’
여기서 표현이란, 어린 시절(또는 트라우마가 발생한 시점)에 충분히 표현되고 인정받았어야 할 감정이나 욕구가 있는 그대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일단, 트라우마가 느낀 두렵고 슬픈 부정적인 감정들이 충분히 표현되고 나면 그 감정은 해소가 된다. 감정에는 과거의 경험과 이미지를 접착제처럼 우리의 뇌 속에 붙여놓는 기능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기억이다. 그렇기에, 이 접착제가 해소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과의 연결이 해제된다.
그렇게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감정이 해소되고 난 후, 그 트라우마를 안겨준 대상에게 감정을 표현한다. 실제로 그 대상은 상담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그 대상이 그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담자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내담자를 괴롭히던,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내담자의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이 최면상담의 아주 강력한 장점이다. 그렇다면, 실제 대상에게 말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의 표현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매우 의미가 있다.
사실 인간은 외부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비단 과거의 일뿐만 아니라 현재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조차,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을 필터로 삼아 그렇게 걸러낸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낸 상대의 이미지를 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과거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나에게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상처로 다가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실제 존재하는 상대가 아닌 내가 주관적으로 해석한 상대의 이미지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 실제로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나를 상처 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지금은 없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그 과거에 상처받은 경험에 의해, 현재 영향받으며 살아간다. 이 영향은, 내가 영향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고,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 든, 삶 속에서 계속해서 같은 문제가 반복됨으로써 영향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즉 우리는, 현재에서든 과거에서든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람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나를 상처 준 사람의 이미지가,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에까지 나의 내면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심리치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표현하고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면의 이미지와 소통하고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 해소되어야 했던 것들을 해소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최면은 이 방식을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기예이다.
최면에서는 ‘트랜스’라는 원리를 사용한다. 트랜스에 대해서 이 장에서 깊게 설명하진 않겠지만, 트랜스를 일으키는 방법 중 하나로 ‘집중=몰입’이 있다. 최면상담가는 내담자를 이 집중상태로 능숙하게 안내하여, 앞서 말한 그 사람 내면의 ‘이미지’에 ‘실제감’을 불어넣는다. 정확히는, 내담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그 실제감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안내한다.
이렇게 되는 순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내면의 이미지에 그것이 실제 하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 더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결과는 ‘재경험’이다.
즉, 과거에 트라우마를 유발한 그 상황을, 어른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재경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로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릴 필요 없어.”라고 합리화 함으로써 오히려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감각으로 재경 험함으로써 그 과거 경험이 가지고 있던 강력했던 힘을 약화시키고 그것을 이겨낸 경험으로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내담자는 그 경험 앞에 무력했다. 그러나 그 경험 앞에서 강한 의지와 명석한 통찰력으로 그 경험을 이겨냈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내담자를 괴롭힐 수 있었을까? 없었을 것이다. 즉, 생생한 재경험을 통해 경험이 ‘대체’가 됨으로써, 또한 그 과정에서 내담자를 괴롭게 하던 대상의 이미지와 소통하여 그 이미지가 지닌 의미가 변화함으로써, 내담자는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머리(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난다.(이것이 트랜스의 효과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 수준의 변화가 일어나고, 무의식 수준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효과가 매우 강력하며 영구적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의식 수준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그 변화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외부환경과 관계 맺는 패턴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동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 이후에도 그것을 유지하는 데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최면상담의 강력한 장점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