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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순 Jul 18. 2020

이상한 행성

중국 정딩正定

  수많은 여행 책자들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단연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다. 티베트 라사에서 네팔로 가기 위해서는 라사의 네팔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내가 갖고 있던 한국 여행 책자의 지도를 참고하여 네팔 대사관을 찾다가는 결국 실패했다. 도미토리 같은 방에 머물던 캐나다 친구의 론리 플래닛에는 네팔 대사관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었다. 론리 플래닛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론리 플래닛은 단순히 숙소나 교통편 등 실용적인 여행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정보 너머의,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글들이 짬짬이 곁들여져 있다. 또 론리 플래닛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여행지나 음식점, 숙소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는 점이다. 가령 중국 윈난 다리大理의 어느 호텔을 두고는 "빨간 운동모를 쓴 현관 안내원들, 다채로우면서도 잘 맞지 않는 모자를 쓴 호스티스들 그리고 대리석 계단 등 이 호텔은 분명히 주변의 다리 경관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하지를 않나, 다리大理의 어떤 이탈리안 식당을 두고는 "이태리 요리인 볼로네제는 자신 있게 권할 만하다. 어떤 이태리 방랑객이 요리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라고 하는 식이다. 막막하고 피곤한 상황에서 여행 안내 책자를 읽다가 간혹 키득거릴 수 있는 여유를 주는 미덕이 있는 책이다.

  유일하게 론리 플래닛에 속았던 곳은 정딩正定이다. 론리 플래닛에는 이 정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이 예쁘장하고 오래된 성곽 마을은 스자좡에서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지방의 자랑거리다. 중국 사람들은 정딩을 '아홉 개의 타워, 네 개의 탑, 여덟 개의 멋진 절과 24개의 금색 아치문'이라고 부른다. 아직도 많은 탑과 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일부 아치(파이러우排樓)는 화려하게 재단장했다."


  베이징에 오래 머물고 있을 때,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가볼 만한 곳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행선지를 정딩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론리 플래닛의 그 매력적인 묘사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곳은 꼭 그런 곳이었다.

  정딩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스자좡石家庄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베이징에서 스자좡 가는 열차와는 달리 스자좡에서 출발한 열차는 완전한 시골 기차였다. 시골 기차가 다른 기차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사람들이다. 시골 기차에는, 당연히 시골 사람들이 탄다. 볼이 바알간 소녀(시골 사람은 아기도 볼이 붉다)도 정겹고, 어떤 할아버지는 사람이 너무 좋아 보여 무슨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다 못해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는 바구니에 강아지를 데리고 앉아 웃고 있었다. 혼잡한 시골 기차에 자리가 없어 통로에 서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동안 기차는 어느새 정딩 역에 도착했다.

  


  아마도 겨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틀림없이 따사로운 봄날에 오면 론리 플래닛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예쁘장하고 오래된 성곽 마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날은 춥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찾던 숙소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숙소를 찾다가 한 여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대중목욕탕으로, 2층은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겨울 추위 탓이었는지, 흐린 날씨 탓이었는지 작은 도시 정딩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채색되어 있는 건물들도 색은 자꾸 바라가고만 있었다. 여관 1층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아저씨가 꾸부정히 내다본다.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요?"

  "그럼."

  "얼마죠?"

  "목욕탕 포함 50위안."


  당시 50위안은 한국 돈으로 6천 원 정도였다. 6천 원이라, 그것도 그 가격에 도미토리가 아닌 싱글룸이라니, 게다가 목욕탕까지 이용할 수 있다니. 몸이 얼어 있던 나는 목욕탕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나기 시작한다. 주인아저씨를 따라가 안내받은 2층 방은 상당히 넓었다. 이렇게 넓은 방에 목욕탕까지 50위안에 불과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마침 얼마 전에 본 중국 영화 <투게더>가 떠올랐다. 바이올린 천재 샤오천의 교육을 위해 시골에서 아들과 북경에 온 아버지 리우청은 저렴한 숙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숙소는 목욕 포함 20위안이었다. 아버지 리우청은 목욕탕 안에서 건달 무리에 둘러싸인 채 '그러니까 20위안에 목욕과 침대를, 맞나요?' 하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 가격은 한 방에 여러 사람이 묵는 도미토리 가격이었다.(결국 리우청은 모자 속에 감추어두었던 전재산을 도둑맞는다.) 이 영화는 눈물을 쥐어짜는 구석이 없지 않지만 샤오천의 훌륭한 연주와 리우청의 연기가 빛을 발한, 겨울에 보면 좋은 따뜻한 영화다.


  목욕탕은 평범했다. 한국 목욕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작은 도시에 대중목욕탕이 있는 게 신기했다. 어떤 한국인이 중국에 목욕탕이 없다는 걸 알고 중국에서 목욕탕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국인들이 너무 안 씻어 그렇다고 하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비해 잘 안 씻는 것은 분명하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차이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모두들 그러니 딱히 문제 될 게 없다. 나도 중국에서 3일 동안 세수조차 못 해 본 적이 있는데 처음 이틀은 정말 괴로웠다. 어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3일째가 되니, 평화가 찾아왔다. 냄새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방의 등불은 침침했다. 북경에서 스자좡을 거쳐 정딩까지 온 것도 그렇고, 추위 속에서 정딩의 이곳저곳을 방황하면서 피로는 잔뜩 쌓여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어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듯했다. 그런데 왠지 잠이 오질 않는다. 침침한 등을 켜고 보니 어쩐지 이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의 한쪽 벽면은 짙은 색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밤이라 잘 안 보이겠지만 바깥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커튼을 열자, 거기에 하얀 벽이 드러났다.

  "이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네."

  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쪽 벽에도 작은 커튼이 있기에 작은 창문이라도 있기를 기대하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이번에도 하얀 벽이 드러났다.

  "올 줄 알았네. 어서 와."

  그쪽 벽이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이라니. 갑자기 답답함이 더해졌다.


  침대에 앉아 생각한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가 왜 이 이상한 곳에 있는 거지? 이곳은 현실 세계인 것일까? 침침한 조명 때문에 비현실성이 더해져 갔다. 그래도 잠을 자야지, 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다시 누워 보지만 잠은 좀체 오지 않는다. 왠지 방을 더 둘러보아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불을 켜고 침대에 앉아 있자니 자꾸만 침대맡에 걸려 있는 그림에 신경이 쓰였다.

  이상한 그림이었다.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서서 젖가슴을 내비치고 있는 흑백의 그림. 나도 모르게 그림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그림을 담았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데 자꾸 그 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그림에서 어떤 힘이 느껴졌다. 다시 불을 켜고 침침한 조명 아래서 나는 그 그림을 한동안 응시했다. 겉보기에 이상할 것 없는 그림이었다.



  다음 날 아침, 1층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곳에서 겨우 탈출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대체 그 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방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창문이 하나도 없어 답답함을 느꼈던 것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리고는 그 방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한국에 돌아와 그때 그 방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그때 그 이상한 그림을 찍은 사진은 사진 자체도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한참 주시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존재는 원래의 그림 안에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나는 그때 그 방 안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는데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림 밖에서 나와 함께 그 기괴한 방에 있었던 것일까. 춥고 답답하고 기이했던 시골 마을에서의 어느 밤. 그건 다 론리 플래닛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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