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foten Norway
히치하이킹 노하우, 그러니까 여러 명이 히치하이킹을 할 때 최대한 멀쩡해 보이는 이를 대표로 내세워 차를 세우는 전략에 또 한번 걸려든 적이 있다. 이번에도 노르웨이 로포텐에서, 젊은 커플을 태우고 오(Å)까지 갔던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크발비카 해변에 들렀다가 오슬로로 돌아갈 참이었다. 오(Å)를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길가에서 웬 젊고 멀끔한 사내가 차를 세웠다. 딱히 급한 일도 없었기에 세워주었다. 람베르그 방면으로 가면 태워달라고 했다. 람베르그까지는 아니지만 그 근처까지는 가니 타라고 했다.
사내가 쭈뼛거리는 사이, 이번에는 갑자기 길 아래쪽에서 웬 원시인 같은 사내가 튀어 올라온다. 진짜 이러기야? 아, 또 걸렸군, 하는 말이 무의식 중에 튀어나올 뻔했다. 길 아래서 튀어 올라온 사내는 원시인이나 진배없었다. 낡고 떨어진 누런 티셔츠, 햇빛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머리카락만큼 길어버린 수염, 날것의 눈빛, 잽싼 몸짓. 모든 것이 원시의 느낌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한두 마디 나누어본 직후 금세 알 수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두 친구를 태우고 차를 출발했다. 둘 다 모스크바에서 왔으며 노르웨이의 살인적인 물가에 기겁을 하고 있다고 할 때, 그들의 표정은 그 높은 물가를 상쇄하는 멋진 풍경들 때문인지 평온해 보였다. 이 친구들을 차에 태우고는 또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된다. 두 명 이상의 히치하이커들이 히치하이킹을 할 때 '먹잇감'을 위해 젊은 여자 '하나'만 내세우거나 최대한 멀끔한 사람 '하나'만 내세운다는 사실.
멀끔한 청년은 드미트리. 모스크바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털북숭이 원시인 이름은 다니엘(그냥 '포카'라 부르기로 했다)로 그 역시 모스크바에서 영어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드미트리는 영어가 서툴러 나와 거의 대화를 못 나누었고(그렇지만 그 역시 좋은 사람이다) 주로 털북숭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달팽이처럼 어마어마한 짐을 짊어지고, 그로도 부족해 남은 짐을 옆구리에까지 끼고 다녔다. 텐트는 기본이고. 그래서인지 차를 세워 준 내게 참 고마워했다.
그들은 람베르그 방면으로 가다가 적당한 곳에 세워달라고 했다. 마침 람베르그로 향하는 주 도로에서 크발비카 해변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에 차를 세웠다. 그들에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크발비카 가려고요."
크발비카는 바로 나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그들을 내려준 곳에서 크발비카 해변에 가까운 베이스캠프까지는 도로를 따라 6km는 족히 더 걸어야 했다. 거기서 또 산길을 따라 2km 남짓 걸어야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나도 지금 거기 가는데!"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기뻐하느라 그들이 다시 올라탄 차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이 친구들은 나 덕분에 2km 남짓의 산길만 걸으면 되었던 것이다. 크발비카 해변과 가장 가까운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그들은 짐을 좀 정리한다고 하여 나 먼저 해변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해변은 아주 어려운 길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산길을 한참 걸어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되겠지?' 하는 끝나지 않는 언덕을 계속 올라야 했다. 아마 크발비카 해변이 지니는 매력은 그런 것일 터이다.
'손쉽게 와서 나를 보려고? 어림도 없어!'
해변은 고요했다.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해변이었다. 산그늘이 해변 반쪽에 드리워 있었다. 나는 곧 오슬로로 돌아가야 했기에 해변에서 조금 머물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 친구들은 해변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는다 하였다. 뒤늦게 해변에 도착한 드미트리가 내게 사과 하나를 건넨다. 짐도 무거울 텐데 힘들게 지고 온 식량을 내게까지 나누어 주다니. 러시아 인심이라니. 잠시 뒤 털북숭이 포카가 내 쪽으로 와 물었다.
"수프 먹고 갈래?"
러시아식 '라면 먹고 갈래?'인가. 마침 점심때가 다 되어 출출하던 차에 그러마고 했다. 그들은 땔감을 구하러 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서 코펠에 바닷물을 받아왔다. 바닷물은 비밀스럽게 눈이 부셨다. 그들은 온몸으로 짊어지고 온 하얀 브로콜리와 당근으로 맛있는 수프를 끓였다. 빵과 함께 먹은 그 브로콜리 수프는 지금까지 먹어 본 수프 중 최고였다.
여행 중 어떤 친구가 주었다는 수프에다가 하얀 브로콜리와 당근을 썰어 넣은 그 수프 맛은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가끔 그런 수프를 끓여 먹어보지만, 역시나 크발비카 그때의 맛은 나지 않는다. 그 수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크발비카 해변의, 반짝이는 모래도 조금 들어간 바닷물이 있어야 하리라.
+ 크발비카 후기 : 이후로 몇 년 뒤, 그러니까 2019년 여름에 크발비카에 한 번 더 찾아갔다. 어느새 우리들만의 고요한 해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가족 단위의 중국인 여행객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잠시 크발비카는 가슴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