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 탈린
한 달가량, 혹은 그 이상 오래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예민한 사안 중 하나는 빨래다. 장기 여행을 하면서 많은 옷을 싸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적절한 때 빨래를 잘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의 여행 철칙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손발은 씻고 잘 것, 다른 하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양말과 속옷은 그날그날 세탁할 것. '아무리 피곤한' 날이 거의 여행 내내인 경우가 많아서 천근만근인 몸을 움직여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빠는 게 일상이었다. 이런 철칙은 건강한 여행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에스토니아 탈린에 도착하던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놈의 북유럽 날씨란 변화무쌍하다. 잠깐 비가 내리고 금세 개어 화창해지고. 그나마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금세 화창해질 때 다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었다. 날씨는 참 우리의 컨디션과 기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상에서도 그렇지만 여행 중에도 날씨는 참으로 중요하다. 아무튼 탈린에 도착했을 때엔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고, 자그마한 우산을 쓴 나는 옷이며 짐이 무사할 리 없었다. 얼굴만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정도였다.
비 맞은 생쥐 모양, 비 맞은 중 중얼거리듯 투덜거리며 길을 한참 헤맸다. '비 맞은 생쥐 모양'과 같은 말로 '비 맞은 중 담 모퉁이 돌아가는 소리'라는 게 있다. 비 맞은 중은 담 모퉁이를 돌 때 그냥 조용히 돌지 않는 모양이다, 아, 빗속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흠씬 맞으며 담 모퉁이 돌아가는 중의 중얼거림이여. 대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일까. 아무튼 나도 무언가 중얼거리며(마음속으로 그랬는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는지는 모르지만) 길을 헤매다가 겨우 탈린 귀퉁이 숙소인 요가 레지던스Yoga Residence를 찾아내었다.
비를 쫄딱 맞고 벨을 한참 누른 뒤 문이 열렸다. 리셉션으로 가니 웬 청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청년의 표정은 금방 딸기 케이크라도 먹은 듯 부드러웠다. 내 여권을 확인하자 짐짓 놀라며
"한국인이에요?"
하고 확인을 한다. 그렇다고 하자 상당히 반가워한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라고 해서 손해를 본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제가 방금 한국 영화를 하나 봤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제 인생 영화예요. 그런데 손님이 그 영화 주인공과 꼭 닮았지 뭐예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눈앞에서 연예인을 보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그래요? 영화 제목이 뭔데요?"
"가만있자... 영어로 제목이.. 아, 'Castaway on the Moon'이던가."
대체 무슨 영화지? 달 조난자? 인터넷 검색이 여의치 않았던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그냥 한국 사람이니까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가령 우리가 <노이 알비노이>라는 영화를 감동적으로 보고 난 직후 아이슬란드에서 왔다는 청년을 만난다면 괜히 <노이 알비노이>의 주인공 토마스 레마퀴스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내가 주연급 영화배우를 닮았다는 리셉션 청년의 말에 나는 쓸데없이 우쭐해졌다.
레지던스는 혼자 쓰기 과분할 만큼 넓고 호화로웠다. 무엇보다 세탁기가 있었다. 짐을 부리고 한숨 돌리고 나서 세탁을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문제인지 세탁기에서 이상하게 답답한 소리가 나더니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연기는 방 안 가득 차올랐다. 타는 냄새도 진동을 했다.
당황한 나는 세탁기 전원 코드를 뽑고 손으로 세탁을 했다. 그리고는 이 사고에 대해 청년에게 알리려 리셉션에 갔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후로도 자백을 위한 적절한 때를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사고에 대해 자백하지 못하고 찜찜한 기분으로 숙소를 떠나왔다.
탈린을 떠나오던 날, 무척이나 화창했다. 리셉션 청년이 택시를 불러주어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택시를 타고 페리 터미널로 향했다. 페리 터미널에 거의 도착할 즈음 택시 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레지던스 리셉션에서 온 연락이었다. 레지던스에서 불러 준 택시였기에 기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결국 세탁기 문제가 발각된 것이구나. 내가 머물던 방에 들어가자마자 세탁기를 먼저 확인한 건가 싶을 만큼 빨리 발견하고 연락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실은 그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방의 열쇠를 반납하지 않고 온 바람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레지던스에서 페리 터미널까지 지불한 택시비 6유로를 한 번 더 치르고 열쇠를 건네며 레지던스에 잘 반납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세탁기는 어떻게 되었냐고? 별 문제가 아니었던지, 혹은 그냥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영화에 취해 있는데 주인공이 눈앞에 현현했다는 벅찬 감동을 차마 조각 내기 싫어서였는지 이후로도 레지던스로부터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방 열쇠 때문에 두어 번 레지던스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는데도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리셉션 청년의 인생 영화 "Castaway on the Moon"은 다름 아닌 "김씨 표류기"였다. 영화 주인공으로 대접받은 건 좋았지만, 영화에서 주인공 김씨 역을 맡은 정재영의 차림새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의 톰 행크스와 별 차이가 없었다. 봉두난발에 수염 가득한 얼굴로 씻은 지 몇 달은 되어 보이는 행색이라니. <김씨 표류기>의 주인공 모습은, 내가 비를 맞고 탈린에 도착할 때의 그런 날것의(정확히는 '딱한') 모습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