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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순 Sep 20. 2020

시차

  중국 작가 위화는 <시차>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에 처음 갈 때 시차 때문에 겪은 난감함에 대해 적고 있다. 먼저 도쿄로 가서 샌프란시스코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고 그곳에서 다시 워싱턴으로 가는, 스무 시간이 넘는 여정을 지나면서 위화는 가장 먼저 도쿄에서부터 난감함을 겪었다. 중국과 도쿄가 한 시간의 시차가 나는 것을 생각지 못해 하마터면 샌프란시스코 가는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는 것이다. 이후 손목시계를 미리 미국 시간으로 맞춰 놓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실수 없이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비행시간이 8시간이나 되는 것에 좌절한 위화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는데, 이륙 후 네 시간쯤 지나자 워싱턴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오고, 이에 위화는 얼떨떨해한다.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은 세 시간의 시차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금 다른, 그래 시차가 좀 있는 시차 이야기를 해보겠다. 낯선 여행지에 내 몸이 제대로 적응했다는 증거는 시차가 없어지는 거다. 시차는,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내게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0여 년 전 아테네에서였던가, 훤한 대낮에 졸음이 쏟아져 도저히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갑자기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그 뒤로 여행 때마다 은근히 시차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유럽의 어떤 곳에서는 오후 4시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와 기어코 한숨을 자고 나야 움직일 수 있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새벽 2시만 되면 눈이 떠져서 가슴이 철렁, 했다가 금세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시차에 난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나만의 비법 같은 걸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8시간이라도, 아니 10시간이라도 시차 같은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아. 미리 준비만 한다면 말이지.’ 


Lisboa, Portugal


  포르투갈과는 8시간 차이가 나니 출발 8일 전부터 한 시간씩 늦게 자고 한 시간 더 늦게 일어나는 거다. 그렇게 해서 포르투갈에 도착하면 나는 온전히 포르투갈 시간으로 아침 6시만 되면 일어날 수 있고 밤 11시가 되면 잠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8일 전부터 나는 포르투갈의 시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자면 한국에서의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 지장이 있다는 건 감안을 해야 한다. 여행지에서 시차 없이 도착 첫날부터 산뜻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어느 정도 감내할 만했다. 


Lisboa, Portugal


  사실 이 아이디어는 나의 독창이 아니다. 모 선생님은 20일의 시간과 20갑의 담배만으로 담배를 끊으셨다 했다. 첫날에는 담배 한 갑을 사서 20개비를 피운다. 이튿날에는 담배 한 갑을 사서 19개비를 피우고 나머지 한 개비는 버린다. 사흘째에도 담배 한 갑을 사서 18개비를 피우고 두 개비를 버린다. 이런 식으로 스무 번째 날이 되어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하셨다. 

  여행 출발일이 되어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포르투갈로 향했다. 그래서 그야말로 한국에서와 같은 컨디션으로 포르투갈 여행을 했는가. 아니다. 비법 같은 건 없었다. 내 몸의 시계는 한국 시간도 포르투갈 시간도 아닌 알 수 없는 곳의 시간을 가리키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생소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질지 모르는 시차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지구 상에서 먼 곳으로 이동할 때 시차를 겪게 되지만 혹 지도로 확인되지 않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할 때에도 시차를 겪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우리는 태어나서 몇 달 동안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지 않는가. 또 나이가 들어서는 아침잠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 와서 시차를 겪고, 다음 세상과의 시차에 대비하기 위해 아침잠이 없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말이다. 역시 그럴듯하다. 

  그런데 내가 그리는,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떤 선생님은 팔순이 넘어서도 밤 1시가 되어서야 잠에 드시고 아침잠도 푹 주무셔야 했다. 팔십 노인이 아침에 늦잠을 잔다는 것은 어쩐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의 시차 이론이 이번에도 무참히 어그러졌다. 선생님은 혹시 그냥 다른 나라로 오래 여행을 떠나신 건 아닐까. 그곳에서 시차로 곤혹스러워하지는 않으실까. 이럴 줄 알았으면 지구에 있을 때 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걸, 하시며 말이다.  

  

Havana,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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