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사진에 대하여
항상 혼자 여행하면서, 처음에는 그 흔한 셀카라는 것도 찍지를 못하였다. 기껏해야 혹시나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쭈뼛쭈뼛하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번 찍어 본다거나 하는 게 전부였다.
여행하면서, 나에 대한 사진을 찍는 일이 좀체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일 검은숲에 갔을 적에는 나의 카메라로 또 다른 카메라를 찍어 주고는 흡족해 하기도 했다. 데리고 간 친구들끼리 서로 사진을 찍어 준 것이다.
나는 사진 찍히는 게 여전히 어색하다. 사실 사진 찍히는 일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 느낌을 잊고 지내지만 한때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입은 옷이 어색하고 멘 가방이 어색하고. 세상은 참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나만 어색했고 그래서 어딜 가나 나는 쭈뼛쭈뼛했다.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세상에 맞추려 발버둥치는 게 오히려 더 어색한 건 아닌가. 세상의 빛깔에 맞게 나를 물들이고 사람들의 안광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옷을 입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색하다면 그냥 어색한 대로 존재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래서 그때부터 사진 찍힐 일이 있을 때 조금 안심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줄기차게 내게 웃으라 강요했지만 나는 ‘억지로’ 웃지는 않았다. 어색한 자연스러움, 어색한 나. 왜 꼭 모든 사람들은 사진 찍을 때 웃어야 하는가, 혹은 행복할 때의 모습만 남겨야 하는가. 분명 사진을 찍는 순간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독일에 갔을 때, 가게 진열장에 놓인 인형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알고 있던 인형들과 표정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바비인형 같은 것들, 우리나라에서 보아오던 인형들은 한결같이 다들 웃는 표정, 밝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만난 인형들은 하나같이 무표정이었다. 아니 어떤 인형은 시무룩한 표정이었고 또 어떤 인형은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이런 것이 국민의 행복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밝은 인형들만 접하던 아이들은, 으레 사람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어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무의식으로 흘러들지 않을까. 그래서 기분 좋은 상태, 행복한 상황이 아니면 자신은 불행하다고, 존재 가치가 없다고 쉬이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무표정의 인형들에 익숙해져 있었더라면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 행복하다고도 불행하다고도 느끼지 않는 그런 상태를 디폴트로 여기게 되지 않을까. 어쨌든.
대만 영화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째서인지 꼬마 주인공 양양이 카메라를 들고 수시로 셔터를 눌러대던 장면, 그리고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죄다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이었던 장면, 그것은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꼬마 양양.
영화를 보기 이전에도, 여행을 다니며 찍은 셀카라는 것은 거의가 내 뒷모습을 스스로 찍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