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숨을 달게 쉬는 시간
책 표지에 끌려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숲에서 한나절>이라는 책도 나무와 초록 잎들이 그려진 연초록 표지가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읽다 보니 표지만 좋은 책이 아니라, 내용도 좋았다. 다양한 꽃과 나무들의 사진과 깔끔한 일러스트가 있어서 잘 알지 못했던 식물들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는 것도 좋았지만, 저자의 숲에 대한 생각에 깊이가 있는 점이 더 좋았다. 숲해설가인 저자는 숲의 아름다운 힘으로 지친 삶을 위로받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보라고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4437
<숲에서 한나절>의 남영화 저자는 어떤 사람과 친구가 되려면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자연도 알려고 노력해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숲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숲을 들여다보는 힘을 기르면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주 사소한 일상의 풍경들 속에서 색다른 의미와 아름다움, 재미를 찾아낼 줄 아는 '행복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은 식물학과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꿈은 결국 이루지 못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꽃과 나무들을 보면 절로 눈길이 가고, 숲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봄의 색깔은 다양하지만, 봄에 피는 꽃들에는 노란색 꽃이 많다. 남영화 저자는 봄 숲에는 유독 노란색 꽃이 많은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꽃이란 곤충들 눈에 잘 띄어야 하는데, 이른 봄 어둡고 칙칙한 숲에서 노란색이 가장 눈에 잘 띠기 때문에 산수유와 같은 노란색 꽃이 가장 먼저 핀다고 한다. 그러나 초록 잎이 무성 해지는 늦봄이나 여름에는 그 대비 색으로 가장 눈에 잘 띄는 흰색의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산수유 꽃처럼 여린 빛깔을 가진 사람에게 "넌 도무지 색깔이 분명치 않아서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한다. 꽃이 그런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 이디. 사람도 숲도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내가 어릴 때는 방학 때마다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곤 했다. 할아버지는 꽃과 나무를 가꾸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손주들 먹으라고 마당에 작은 딸기들과 토마토를 심어 놓기도 하셨다. 방학에 할아버지 집에서 보낼 때는 처음에는 초록색이던 작은 열매들이 어느새 붉은 기운이 돌더니 먹음직스러운 붉은색 과일들로 변하는 순간들을 경이롭게 지켜보곤 했었다. 할아버지 집에는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과 나무들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어른들이 보리똥이라고 부르는 작은 붉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보리수 열매였던 것 같다.
남영화 작가는 흔히들 '꽃이 피는 시간을 절정의 시간이라고들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꽃이 지고 아무도 봐주지 않을 때 비로소 열매의 시간이 온다고 한다. 보리수나무 열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작고 초록색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감에 따라 조금씩 붉은 기운을 띄고 어느 날 붉디붉게 탐스런 색깔로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꽃이 필 때처럼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도 있지만,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간다. 꽃이 진 뒤에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사실 가을보다 봄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다. 봄꽃들이 더 예뻐서, 찬란한 봄이 가는 것이 아쉬웠다. 가을이 오면 왠지 곧 겨울이 올 것 같아 싫었다. 단풍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던 수레 멈추게 한 건 아름다운 황혼 단풍/서리 맞은 단풍잎, 봄 꽃보다 붉어라'라는 산행이라는 당시의 한 구절을 젊은 날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남영화 작가는 '나답다는 것이 자연처럼 가장 편안한 상태다'라고 이야기한다. 가을이 되면 엽록소 활동이라는 목적을 위해 초록색을 띄었던 나뭇잎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가장 나다운 색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떤 필요와 목적을 위해 사회적 색깔을 띠게 되는데, 일부러 치장한 색이 아니라 나다울 때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남영화 작가에 따르면 겨울눈들은 아린이라고 하는 비늘 같은 조각이 여러 장 덮여 있어 추위 등 외부 환경으로부터 눈을 보호한다고 한다. 아린 상처에서 꽃이 피고 잎이 나고 새 가지가 자란다고 한다. 그 모든 아픈 기억을 아린은 알고 있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남들보다 더 힘들게 산 삶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환경에서 안온하게 살아온 삶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다고 한다. 살다 보면 내 잘못이었거나 남의 잘못이었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시절의 탓이었거나 해서 상처 받은 일들이 생겼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런 상처 받는 일들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아렸던 상처는 치유되거나 잊혀졌고 새살이 돋았다. 지금의 나는 수많은 겨울을 지나왔으므로, 더 이상 여린 일년초가 아니고 나이테만큼 강해졌다.
도시에 살다가 나주에 내려와서 가장 좋았던 점 중에 하나가 자연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산림자원연구소 같은 인공적으로 가꾸어진 수목원에 갔지만, 요즘은 야생 갈대가 우거진 영산강길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강물이 햇빛에 비쳐 반짝이며 흘러가고 꽃이 피고 지는 아름다운 광경들을 보고 있으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영산강 자전거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다 보면 가끔씩 조그만 뱀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옆에 강이 있고 숲이 우거져 있으니까 뱀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긴 한데,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한다.
<숲에서 한나절>의 남영화 작가는 뱀이 무서워 숲에 나오길 꺼려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 삶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위험들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 언제 나타날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뱀 때문에 햇살 화창한 봄날 숲에 나오는 행복한 하루를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이야기한다.
<숲에서 한나절> 책은 [남해의봄날]에서 나온 책이다. 처음에는 어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지 모르고 보고 있었는데, 책 내용도 좋았지만 책 속의 그림이나 편집이 상당히 깔끔하고 좋았다. 그래서 어디 출판사인지 보았더니 [남해의봄날]에서 나온 책이었다. 나는 [남해의봄날]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 좋다. 몇 년 전에 통영으로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가본 봄날의 책방도 상당히 인상 깊어 공유서점으로 브런치에 소개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kw0762/36
남해의봄날에서 나온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책도 같이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07234
* 따듯하게 위로가 되는 책들을 읽으며 추운 겨울을 잘 보내고, 꽃피는 봄을 다시 맞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겨울에는 숲의 모든 식물들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 추운 겨울 동안 내밀하게 생명력을 지켜내고 있고, 따사로운 봄이 오면 새순을 내밀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힘든 계절에는 그냥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봄을 준비하며 그 계절을 견뎌내야만 꽃피고 열매 맺는 시절이 온다.
글 : 이계원(공유경제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