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함께라면 사계절이 매일매일 좋은 날
한동안 차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나주에 영산나루라고 일제시대 문서고로 사용되었던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레스토랑과 찻집을 연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여기에 1주일에 한 번씩 차 수업을 받으려 다녔다. 차라고는 녹차와 홍차 정도 밖에는 마셔 본 적이 없고, 그것도 커피에 비하면 맛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차 수업을 받으면서 마셔본 차들은 생각 외로 맛있었다. 그동안 티백으로 된 맛없는 차들을 마셨기 때문에 차가 쓰고 맛이 없었던 거지, 제대로 우려낸 좋은 차들은 깊이 있는 향을 가지고 있었고 맛이 달았다.
사실 차 수업에 좋았던 것은 차의 맛을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고택인 영산나루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같이 차 수업을 받는 사람들이랑 다과를 곁들인 맛있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들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일본 작가인 모리시타 노리코가 쓴 <계절에 따라 산다>라는 책에 보면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차와 함께라면 사계절이 매일매일 좋은 날]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인데, 이 책의 저자도 젊은 날 차 수업을 받기 시작해 일주일에 한 번씩 40년간 다도를 배우러 다닌다. 차와 함께 배우는 인생의 경험들을 겨울, 봄, 여름, 가을 1년 사계절 24절기의 변화 속에 녹여내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915751
다도를 배우는 <계절에 따라 산다>의 일본인 저자에게는 '정월'이 일 년에 두 번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연초에 시작되는 일반적인 정월로 가족과 함께 정월 음식을 먹으며 매년 똑같은 텔레비전 신년 특집을 보며 보낸다. 두 번째 정월은 새해 첫 다회이다. 새해 첫 다회에서는 복을 뽑는 제비뽑기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당첨이 아니라도 모두에게 확실히 작은 복이라도 온다고 한다.
내 경우에도 일 년에 새해가 두 번이다. 양력과 음력 설날이다. 달력상 1년의 첫날인 양력 설날에는 주로 부모님을 보러 갔었다. 음력 설날에는 시댁에서 제사음식을 만들고 차례를 지냈다. 똑같은 설날인데도 하는 일이 다르고 느낌도 많이 달랐다. 양력설에는 명절이라는 느낌보다는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느낌이 강했다. 음력설에는 오래된 풍습들이 우중충하게 남아 있어, 명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계절에 따라 산다>의 저자는 일상생활에서 24절기를 의식한 적은 거의 없지만, 이상하게도 해마다 입춘 날에는 은은한 향기가 느껴져 보면 어딘가에 매화가 피어 있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도시에 살아서 사실 매화 향기를 느껴 본적이 거의 없었다. 봄이 오는 것은 나무에서 연초록 잎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에서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남쪽 지방으로 이사 오면서 광양의 청매실 농장에 매화꽃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온산의 매화나무 꽃을 보면서 꿈속의 무릉도원과 같다고 생각했었다. 봄은 벚꽃이 아니라 매화나무에 먼저 오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매화꽃이 필 때는 완연한 봄이 아니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다. 꽃이 펴서 봄인 줄 알고 겨울옷을 집어넣고 얇은 봄옷을 꺼내 놓았는데, 겨울은 그냥 물러나지 않고 몇 번의 봄 시샘을 한 후에야 봄에 자리를 물려준다. 그러고 나면 노란 유채꽃이 피고, 버드나무에 연초록 물이 오르며 완연한 봄이 된다.
사실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장마철을 싫어한다. 덥고 끈적거리는 느낌을 싫어했다. 그런데 살면서 어떻게 맑고 좋은 날만 있을 수 있을까? 춥고 덥고 비 오는 날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에 꽃피는 봄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운 여름도, 아름다운 가을도, 추운 겨울도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우면 더운 데로 추우면 추운 데로 그 속에서 그 계절이 주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계절에 따라 산다>의 저자가 사는 일본은 장마가 긴 나라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덥고 끈적끈적해진다. 일본 다도에서는 차를 마시는 다실에 그 계절에 어울리는 족자나 꽃을 장식한다. 비가 그치니까 다도 선생님은 [비가 그치니 꽃도 대나무도 선선하다]라는 족자를 내건다. 차에 어울리는 과자도 시원한 과자를 준비해서 준다.
내 경우에는 중국차, 영국식 홍차, 일본차 등 다양한 차 수업을 조금씩 받았다. 일본차를 배울 때는 형식이 너무 엄격해서 차 한잔 마시는데 너무 불편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일본차에는 계절이 녹아들어 있었다. 내가 일본차 수업을 받았을 때는 가을이었는데 선생님이 가을 느낌으로 장식해 주셨다.
어릴 때는 우리나라에 4계절이 있는 것이 싫었다. 춥고 덥고 한 것도 싫었고, 옷도 계속 바꾸어 입어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1년 내내 한 계절이면 정말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 년 내내 변화가 없으면 삶이 좀 밋밋할 것 같다.
<계절에 따라 산다>의 저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 나라의 계절은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해서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계절 안에서 아주 짧은 순간인 '지금'을 살아간다." 저자는 가을에 아버지 묘에 성묘하러 가면서 꽃무릇을 보면서 피안을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은 죽은 자가 태양이 지는 서쪽에 있다고 믿어서, 그들이 있는 저세상을 저 너머의 언덕, '피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도 아빠랑 산책 다니면서 같이 보았던 꽃이나 같이 먹었던 음식들을 보면서 불쑥불쑥 피안 너머의 아빠를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겨울에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꽃이 동백꽃이다. 꽃이 없는 계절에 곧 봄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선명한 꽃이다. 사실 나는 동백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꽃도 단순해서 아름답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고, 꽃이 져서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도 보기 싫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초록잎에 붉은 동백꽃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보였다. 또 꽃이 없는 겨울에 온 힘을 다하여 겨울이 끝나고 곧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끝은 시작이기도 하다. 어저께가 동지였는데 동지는 일 년 중에 밤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하다. 동지가 끝나면 다시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서서히 봄이 시작된다. 올 한 해 코로나로 많은 분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제일 힘든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추운 겨울이 맹위를 떨치고 있어도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따뜻한 봄날이 돌아온다. 우리가 믿을 것은 계절이 바뀌 듯이 우리 삶도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기다려보자.
글 : 이계원(공유경제연구소 대표)
* <계절에 따라 산다>의 작가가 쓴 <일일시호일 : 매일매일 좋은 날>이라는 책이 있다.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차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한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9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