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야, 이제 좀 쓸게

by 광쌤

쓸개를 떼어낸 뒤에는 분명 쓸 게 많아질 줄 알았다.
몸에서 뭔가 빠져나갔으니 대신 말이나 생각쯤은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앉아보니 글감도 멘탈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쓸개의 빈자리가 애처롭던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어느새 잊은 지 오래다. 다 잊기 전에, 쓸 게 하나라도 남아 있을 때 그냥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큰 결심까지는 아니고, 그냥 이참에.



모처럼 혼자 떠난 여행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모자랄 판에 쓸개 빠진 나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 노트북과 마주 보고 있다. 글 쓰는 일이 좋다는 걸 이제 와서야 인정하면서,‘여행지 카페에서 글 쓰기’를 버킷리스트에 넣고서야 겨우 제목 하나를 적고 있으니 지나간 시간들이 조금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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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이었다.

개학을 준비하며 집에서 버티던 무더위조차 지금 와서는 괜히 아쉽던 날, 갑자기 복통이 몰려왔다. 숨 쉬는 것도 버거웠고, 어떤 자세를 취해도 통증은 요지부동이었다.

“후, 후.”
심호흡만 괜히 커졌다. 소화제도 먹어봤지만 두 시간째 이어지는 통증은 이건 뭔가 아니라는 신호였다. 시간은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몇 시간 뒤면 남편은 서울로 떠날 예정이었다. 한 달 전에도, 두어 달 전에도 비슷한 복통이 있었던 터라 괜히 더 무서워졌다.


생애 첫 응급실이었다.

검색창에 이것저것 쳐봐도 위로가 되는 결과는 하나도 없어서 결국 남편을 깨웠다.
아파서 서 있는 것도 힘든 나는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덥고 냄새나는 지하주차장 옆 의자에 앉아 자리가 나길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요?”
그 말이 짜증이었는지 간절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저희도 모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의자는 더 딱딱해졌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돈이 없어서인가, 내가 잘나지 못해서인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쓸쓸해졌다. 하지만 당장 눕고 싶었고, 통증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겉모습이 낡은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앞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복통이 가라앉았다. 원래의 나 같으면 그냥 집에 갈 법도 했는데,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이 조금 미안해서 그냥 들어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병원에서는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나를 보고 이야기해줬다. 괜히 마음이 풀려서 조금 전 응급실에서의 일을 고자질처럼 늘어놓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부끄러운 장면이다. 그날 밤, 나는 외과 수술을 받았고 쓸개를 잃었다. 평생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퇴원하는 순간까지 병원 사람들은 친절했고, 나는 생각했다.

쓸개 없는 세상도 뭐,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조금 오바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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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떠올리면 나를 살린 건 번듯함도, 유명함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당장 눕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던 곳,
아프다고 인정해도 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걸 참으면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됐다. 나는 그동안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고,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하지 않았고, 조금 이상하더라도 그냥 참고 넘기며 살아왔다는 걸. 이제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조금은 믿어보려고 한다. 쓸개가 주고간 이 능력을 빌어 괜찮은 척하지 않고, 애써 삼키지 않아 보리라.


그래서 앞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씩 써보려고 한다.

쓸개 없는 몸으로 살아보니 생긴 일들, 그동안 참고만 있었던 생각들, 그리고 이제야 꺼내보는 말들까지. 어쩌면

내 인생과 시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내팽겨쳤던 쓸개에 관한 이야기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