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봉, 별도봉 계단과의 한판

닐니리 만보 엄마의 제주 여행 (5)

by 광쌤

특별한 일이 없는 날, 엄마는 사라봉과 별도봉을 휘휘 돌고 있어.

만보를 채우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거든.

만보계가 고장 났나 괜스레 흔들어보기도 하고 말이야.


뜨거운 태양을 피해 걷는데도 으윽 너무 더워 더워.

하지만 <영화로운 다이어트> 회원님들과 함께 하루하루 미션을 클리어해나가다 보면 괜히 부지런히 살아지는 것 같고 기분은 좋아.


꾀돌이 엄마는 계단을 피해 둘레로만 도는 거 알지? 계단이 떡 버티고 있으면 '쏘리~ 씨유 레이러!' 인사를 남기고 쿨하게 돌아가곤 했지. 하지만 '목적 있게 걷기'로 애증의 계단을 걸어보기로 했어.



[계단 (1)]

시작은 가뿐가뿐-

야심 차게 사진도 한 장 찍는 여유를 가져보면서 말이야.


분명 열심히 걸었는데 뒤에서 어르신들이 논스톱 하이패스 걸음으로 엄마를 스쳐가는 가시는 거야. 아주 빠른 걸음으로...


도사처럼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 걸어가셨어.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지는 이 기분은 뭐지?


사라봉 계단은 어렵지는 않지만 은근히 패배감을 주는 곳이야. 한 번에 오를 때도 있고, 반도 못 올라 가 헐떡대며 저질 몸뚱이를 탓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야.


인생이 그렇잖아. 쉽게 올라갈 때도 있지만 늘 그렇지는 않듯이 이놈의 계단은 또 한 번 나를 시험에 들게 했어. 하지만 중간에 포기하면 안 되지. 정상에 도착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풍경을 생각하며 걷고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잖아.


사라봉 정상에서

물론 도사님들은 쉬지 않고 슝 내려가셨지만 경치 감상 핑계로 잠시 멈춰 섰지 뭐. 역시 세상은 만렙 투성이야!


사라봉 정상에 사는 토끼님들은 '거 참 딱하오. 몸이 그렇게 저질 이시오 그래... 쯧쯧'하시며 두 눈을 딱 감아 버리시는 것 같구나.


아, 자존심 스크래치!

이대로 질 수 없지. 계속 가보자!

계속 걸어가 보자!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계단 (2)]

별도봉 산책로는 언제나 행복이야.

걷는 내내 콧노래가 나니까...

휘휘 돌아 걷다 보면....

저쪽에 가파른 계단이 보여.

멋진 풍경으로 볼 때는 좋지만 막상 올라가려면 그저 계단이 되는 곳이지.


가끔은 그냥 풍경 속에 스며든다 생각하면 가파른 길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 같아. 인생의 걸음걸음이 노래가 될지 눈물이 될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 잊지 마.



[계단 (3)]


덥기도 하고 그냥 둘레길로 갈까를 고민하고 있었어.

그런데 최종 관문 별도봉 정상길 나무 계단들이 말을 걸어 오더라고.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냥 못 본 척하고 갈 줄 알았어!"


간다... 가...

척척 척척....

나무 하나하나에 발끝을 걸쳐가며 하나, 둘 걸어갔어.


그러다 나온 나름 엄마가 붙인 깔딱 고개...

숨이 차오더라.

자만심, 허세 다 사라지고... 오만상만 남았어.

엄마 특기지.


그래도 걸었어.

이 코스를 두 번 도는 분들도 계시고, 뛰는 분들도 계시는데 징징 거리는 소리 심하게 낼 수는 없잖아.


어엇, 뭐지?

매일 여기는 '힘들어서 패스!' 하고 쿨하게 통과하던 나였는데 생각보다 쉽게 올라가 지는 거야. 숨은 찼지만 금세 도착해진 정상에서는 구름 팡파르가 울려 퍼졌어.

저 멀리 원당봉은 다음엔 여기로 와... 하고 산뜻하게 웃어줬고 말이야.

한라산은 구름과 고군분투 중이니 인사는 생략하겠다고 하겠다고 했어.


평소에 피하기만 했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여기까지 올라와 보니 바람이 꽤 특별하게 느껴졌어. 구름한테 특별대우받는 느낌이었고 말이야. 계단으로 걸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저도 동훈과 같은 나이를 살면서 때론 삶의 방향을 잡기 어렵고 막연할 때가 있어요. 그 와중에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하고, 다른 어떤 것은 책임감으로 지켜야 하고...

사람이 점점 후져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느낌들이 나이대 특유의 고독이 아닐까요?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막막하고, 가끔은 반대로 '내가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해도 되나'하는 불안함도 느껴지는 시기인 것 같아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본집 1권 중에서 이선균 인터뷰 -



하루를 마무리하려는데 멋진 곰 작가님께서 좋은 글을 선물해 주셨어. 엄마는 인생에서 하염없이 계단을 걷고 있었나 봐. 하지만 가파른 계단은 애써 피하며 살았던 것 같아. 그래서 인생이 잠시 후져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분명 열심히 걸으며 살았는데도 불안했던 것은 그냥 둘레길 같은 삶만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이 고독은 엄마가 끊어내야지.

열심히 계단도 걷고...

겨울의 한라산도 만나러 가고...

남들이 굳이 가지 않는 계단들도 성큼 성큼 걸어가 볼게.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그렇게 살아보자.

후져 보이지 않도록 말이야.



다음에는 같이 걸으러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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