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할머니

by 몽이맘

가을이다. 아직도 배롱나무가 꽃이 피고 있긴 하지만 가을은 가을이다.

가을이니 수확이 많아진다.

지난주에

엄마가 애동고추, 애호박. 가지 상추를 보냈고

아버님은 석류를 보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석류나무가 있었다. 아랫집 수돗가에 있던 석류나무는 작은 나무에 비해 석류가 많이 달렸다. 추석 무렵 익어 차례상에도 올라가기도 했다. 잘 익어 터진 석류를 보면 저절로 침이 고인다. 엄청나게 시고 떫었던 석류.

요즘은 크게 시지도 떫지도 않고 달고 물도 많다.

아버님이 자랑할 만한 석류다.

대구로 나오고 어쩌다 한번 간 시골집에 석류나무가 죽었다. 주인이 없어 돌보지 않아서 그렇겠지. 집이든 나무든 사람이 살고 돌봐야 오래 사는 것 같다. 그 뒤로는 석류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석류를 사본 기억은 있다.

"엄마. 나 석류 하나 사줘."

"갑자기 석류는?"

"무슨 맛인지 궁금해. 과일코너에 파니까 과일이겠지."

"시기만 하고 맛도 없을 건데. 그리고 국산이 아니네. 페르시안산이란다."

"하나만 사보자."

국산 석류보다 두 배나 크고 색도 더 빨간 석류를 하나 샀다. 사 오니 몸이 기억했다. 껍질을 까고 알은 하나씩 떼 딸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두 번 받아먹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시지?"

"응. 너무 셔. 못 먹겠어."

그렇게 냉장고에 돌아다니던 석류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석류는 보기만 좋은 과일이라고 절대 집에 들일 일 없는 과일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아버님이 가져온 석류는 달랐다. 달고 껍질도 얇아 까기도 좋고 싱싱해서 알도 탱탱했다. 하루에 2개는 먹는 것 같다. 아이들도 없고 남편도 출장 중이라 석류는 오로지 내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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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더 많다.

동생네에서 가져온 꽃차나 천년초 다래열매도 있다.

애동고추는 너무 많아 밀가루 옷을 입히고 쪄서 말린다. 고추부각을 만들려고 한다. 고추부각을 얼마 전에 아이들에게 주었는데 너무 잘 먹었다. 남편도 술안주로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맵다고 하나 먹고 뱉어내었던 고추부각.


어릴 적 가을 풍경에 남아 있는 장면이다.


찐 고추를 말리고

무를 썰어 말리고

시래기를 말리고

늙은 호박도 말리고

가지도 감도 비켜가지 못한다.

풋대추를 말리고

추수한 벼를 말리고

햇땅콩도 말리고

콩도 말리고

들깨 참깨도 말리고

보리 싹을 틔워 말린다.

골목이나 다리나 마당이나 해가 드는 자리마다 널어 말리는 곡물로 조심조심 다녀야 한다.

아직 덜 마른 곶감을 하나씩 빼먹고

물기 많은 땅콩도 오며 가며 집어먹는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자리를 깔고 여러 가지를 난다. 바닥에 널기도 하고 벽에 매달기도 하고 소쿠리에 담아 널기도 한다. 작물마다 마르는 장소도 달라진다.

어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티르키에의 고추를 말리는 걸 보았다. 우리나라와 달리 말리지 않은 붉은 고추를 갈아서 소금을 섞어 고추장 같은 양념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가 담는 고추장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여름내 딴 고추를 두 가지 종류로 간다. 고운 고춧가루는 고추장을 담고 굵게 간 고춧가루는 김장을 하거나 양념으로 사용한다.

보리의 싹을 틔워 말린 엿기름을 넣고 보리쌀을 삶아 코가 쨍한 11월 정도에 고추장을 담는다. 추운 건지 매운 건지 코가 얼얼한 날씨에 고추장을 담아 단지에 넣고 굵은소금을 솔솔 친다.

11월이 되면 메주를 쑤는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 내내 할머니의 땀을 먹고 자란 통통한 콩을 가마솥에 푹 삶아 메주를 만든다. 집에 메주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메주를 만들 때마다 네모난 메주틀이 등장한다. 푹 삶은 콩을 자루에 넣고 발로 밟고 으깨어 틀에 넣고 네모나게 만들었다.

너무 무른 메주는 처음부터 매달 수 없어 아랫방 구석에 며칠 두고 더 말린다. 잘 마르면 할머니는 깨끗한 짚을 구해 방을 지을 때부터 있던 대나무 시렁에 매단다. 겨울 내내 같이 지낼 메주가 익어가고 냄새도 폴폴 나고 윗목에는 고구마가 아랫목에는 청국장이나 술이 익어간다.

어릴 적에는 대나무 시렁이 너무 궁금했다.

집을 지을 때부터 있던 시렁이라 벽에서 맞은편 벽까지 이어져 있다. 겨울에는 메주를 매달기도 하고 마른 곡식을 올려놓기도 하고 잘 다려진 옷을 올려놓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옷상자가 한쪽 구석에 있었는데 할머니가 대구로 나올 때 아주 소중하게 들고 나왔다.

"할머니. 저 상자는 뭐꼬?"

"할머니 죽으면 열어봐라."

할머니는 절대 상자를 열어보지 못하게 했다. 대구에 들어와서도 옷장 위에 자리 잡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엄마가 열어보았다.

"할머니 수의다. 할머니가 손수 지은 삼베로 만든 수의다. 좀 쓸지 말라고 나프탈렌 많이도 넣어 놓았네."

엄마도 아버지도 할머니의 수의를 꺼내며 한참이나 울었다. 할머니는 할머니 몸에 맞게 수의를 지어놓고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할머니는 조선시대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1999년에 돌아가셨다. 어릴 적에는 서당에 다니고 한복을 짓고 남편의 두루마기를 손질하던 세대다. 할머니 세대에는 본인 수의를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는 제사가 다가오면 술도 담았다. 여름에는 고방에 겨울에는 아랫방에 술을 익힌다. 자다가 찰 수도 있어 할머니는 술을 담을 때는 술독 옆에서 주무셨다. 집에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지만 제사상에는 술이 빠질 수 없다고 하며 작은 단지에 술을 담는다.

"할머니 ##네 집에서는 술독이 내만 하던데."

"그 집에는 술 마실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지. 우린 누가 마시니?"

할머니 그러면서 술이 익으면 한잔씩 하기도 했다. 간혹 감주도 담아 얼음 동동 뜬 그릇을 내밀기도 했다. 나는 밥알이 많이 들어간 감주를 좋아하고 동생은 맑은 걸 좋아해서 윗물은 동생에게 아랫물은 내게 주었다. 나에게 준 그릇에는 숟가락이 항상 꽂혀있다.


가을이면 할머니가 많이 생각난다. 오늘도 할머니가 만들어 주던 찜고추를 말린다. 할머니의 말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가을볕은 뭐든 말려야 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볕이 너무 아까워."

할머니는 말릴 게 없으면 이불이라도 널어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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