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건조의 뜻은 '재미나 멋이 없이 메마름'을 뜻한다. 인생에 있어서 무미건조함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꼭 찾아온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사실 무미건조함은 사람마다 겪는 일상 속에서 그 강도가 제각각이기에 메마른 정도를 하나하나 따지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무미건조함에서 느껴지고 동반되는... 흔히 말하는 '노잼'을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우울감과는 조금 구분 짓자 마음속의 지각만 건드리고 싶은데 괜히 맨틀과 외핵, 내핵까지 건드리면 글 자체가 어렵고 재미없어질 것 같다.(중요한 것은 그런 심오한 글을 쓸 만한 그릇이 못된다.)
무미건조가 없는 삶은 없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심심한데 귀찮다거나 몰려오는 우울함과 극도의 무기력 등 주문하지도 않은 옵션들이 자기 멋대로 딸려오는 경우가 있어서 난감한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정도면 약간의 재미는 느낄 수 있겠다.' 싶어서 준비하였다. 물론! 음악도 함께!
도움이 된다면 정말 좋겠지만 안된다면 과감하게 댓글로 반박을 해주셔도 좋다.
(글 주제 옆의 노래 제목을 누르시면 해당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블루스 아티스트라면 '신체적 불구 + 과일 + 전직 대통령'의 공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1집(2013)
먹고 싶은 음식은 늘 있기 마련이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를 던지면 주저하지 않고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할 정도로 먹는 것에 진심이며 오늘의 점심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침부터 기운이 나지 않는 아주 평범한(?) 돈 버는 삶을 살고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우리는 가끔 당기는 음식이 제각각 다르다. 장에 기름칠이 하고 싶을 때가 있고 스트레스가 쌓일 만큼 쌓여서 매운 것이 당기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술이 부르기도 한다. 역시 가벼운 무미건조함을 이겨내는 첫 번째 방법은 '먹는 것!' 아니겠는가!
근데 막상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한다. "잘 먹는 건 어떻게 해요?" 글쎄... 1인 가구의 삶에서 가장 잘 먹는 방법? <배달음식 + 필요하다면 맥주 + 유튜브(혹은 넷플릭스 등)> 이 공식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가끔 화상회의를 켜서 음식을 먹기도 하는데 확실히 외로움을 덜어 낼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더라!
(가끔 저와 랜선으로 회식을 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요즘은 밀키트가 확실히 뜨고 있는 것 같다. 어찌 사람이 배달음식만 먹을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물가도 오르고 배달비도 올라서 이제는 월급을 받는 날에 마음을 크게 먹어야 가능할 것 같지 않던가?
그래서일까? 요즘은 내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게 되는데 '밀 키트'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물론 흔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도 밀 키트를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먹기 전의 귀차니즘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건투를 빈다. 혼자 먹는 것에 귀찮음을 느끼는 그대도 나도.어쩌면 늘 밥을 해주셨던 어머니의 희생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희생이다.
산울림 8집은 7집에 비해 훨씬 '발라드스러움'을 강조했다. 7집에서의 <독백>과 8집의 <회상>은 산울림의 둘째, 김창훈이 만들었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산울림 - 회상)>
사실 산울림의 회상은 슬프고 쓸쓸한 곡이다. 슬프고 쓸쓸한 곡이라서 가끔 듣다 보면 노래의 감정선과 나의 감정선이 맞닿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 오면 밖으로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뛰는 것에는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걷는 것은 그렇지 않다. 혼자 노래를 들으며 걸을 수도 있고 그냥 바람을 느끼며 걸을 수도 있다. 잔잔히 생각에 잠기면서 걷되 오래 걸어야 한다. 적어도 1시간을 권장하는 편인데(대충 대중가요를 20곡 이내로 들으면 그 정도겠다) 그래야 돌아와서 노곤함과 약간의 개운함이 그날의 마무리로 맞이해줄 것이다. 요즘 통 걷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지만 일하면서 걷는 걸음수가 10000보가 넘어가는 걸로 봐서는 바빠서 우울한 틈을 주지 않는 것인지 나 자신을 칭찬해줘야겠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긴 걸음을 한 발짝 두 발짝 내딛을 때 나를 위로해준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 옆에서 걸을 때는 나의 발자취와 타인의 발자취를 알아가는 시간이 참 귀한 시간이겠으나 내가 우울감에 빠져있을 때는 타인의 삶에 들어가는 것에 제한사항이 너무도 많다.
가끔은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만 알고 있는 깊은 동굴로 계속 들어갈 수도 있고 그냥 멍하니 있는 시간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던 그 시간을 방해받지 않는다면 차라리 되었다.
동굴로 깊숙하게 들어가기 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체크포인트는 필수! 우리... 그 힘든 행군도 결국 잠자는 곳으로 돌아오듯이 마음도 그래야 한다. 끝을 생각하지 말고 시작점을 생각하며 걷고 걷고 또 걷다가 불 켜진 방으로 돌아오도록 하자. 꼭!
그때 그 시절... 이 곡을 듣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처음 들었을 때는 잘 못 느꼈지만 지금은 정말 와닿는 것이 이 곡의 가사가 아닐까?
어쩌다 멀리 떨어지게 되었지만 일부 지인들은 내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정말 잘 지내는 걸로 인지한다. 오죽하면 전화를 하지 않고 쭈욱 살고 있으면 "요즘은 별로 우울하지 않나 봐요?"라는 말을 아주 가끔 듣는다. 그래, 코로나19로 인하여 혼자 있는 시간이 확실히 더 길어졌을 때 더욱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뚱땅거렸으니까.
나의 고향은 대구지만 몸은 고향과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고향이 그리울 때면 꼭 전화를 돌리기도 하고 명절이면 꼭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잔소리(?)는 30대 싱글남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그래도 괜찮다. 그 자체가 손자를, 아들을, 조카를, 사촌동생을 향한 사랑이니까)
전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닌데 전화번호부에 사람은 많던 적던 막상 내키지 않는다.
'과연 반갑게 받아줄까?'
'그 녀석이 설마 바쁘지는 않을까?'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라는 식의 전화도 걸기 전에 지레 겁부터 먹는 경우가 있다. 손절한 친구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친구라면 전화를 걸어보자. 반대로 전화를 받는 입장이라면 그냥 받아보자. 좋은 소식을 전해줄지 모른다. 만약 다단계를 권유하는 친구의 전화라면 그래도 받고 나서 차단을 하자. 그게 현명한 일이다. 아무튼!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결국 답은 전화다. 스트레스를 갖고 있어서 뭐해....
최근에 정말 전화를 싫어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정말 싫어하는 친구인 것을 알기에 조금 놀랬지만 정말 하나도 맞는 게 없을 정도로 상극인 친구였을지라도 정말 희한하게도 20여분을 통화했다. 그 친구 왈 "서로 안 맞기 때문에 대화가 되는 거야."라고 명언을 남기며 서로 죽이니 마니 딱콩을 때리니 마니 하면서 투닥투닥 되는 것이 정말 즐겁기도 했다. 이렇게나마 서로 스트레스가 풀렸다면 그 자체로도 메마른 땅에 단비 같은 느낌이 아닐까?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주저하지 말고 꼭 전화를 해보자!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정말 별일 없이 살아야 한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데뷔 음반은 2018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무려 94위에 랭크되었다.
대학생 때, 재미있게 봤던 영화 중 <세 얼간이>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대사는 "Aal izz Well"(All is Well)이었다. 이게 나중에 되어서 현재의 삶의 대단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확실히 대단한 영화였다. 러닝타임은 굉장히 길었지만 여운이 많이 남았다. 마침 극 중의 주인공들과 나는 같은 '대학생'이었는데 영화 속 '라주 라스토기'처럼 늘 마음이 불안하여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뛰어내리는 극단적인 선택은 당시 27세가 아니었기에 하지 않았다.) 결국 그 영화가 내게 던져준 말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찾아가!'였지만 대학교 4년간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약간의 좋은 추억과 대학교 졸업장뿐, 그래! 그거라도 남은 게 어디야.
사실 내가 대학을 갈만한 성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교는 꼭 가야 했는데 보통 대학교를 선택할 때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인데 나는 그것도 아니었고 그저 '대학가요제'를 나가고 싶었음과 당시 학과에 밴드 동아리가 있다는 것을 보고 결정하게 되는 다소 경악스러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대학가요제는 시도조차 못했고 모 기독교 단체가 주관하는 CCM경연대회에 두 번 참여한 게 전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은 교회 안 간다.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찾아가기에 주말은 정말 필수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교회는(정확히 말해서 종교는) 적어도 나에겐 확실히 걸림돌이다.
All is Well! 좋아하는 것을 위해 힘든 마음을 잠깐이라도 속여야 한다. 속여도 된다. 결국 나 자신이 먼저다. 애초에 내가 없었다면 이 세상이 없었던 것 인양!.
정말 별일 없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두고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적어도 별일 없이 살아줘야 많은 일들에 대한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을 수 있는 것 같아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부담감이 덜할 것이다.
나 자신에게도 정말 싫어하는 원수 같은 존재가 있듯이 나 조차도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 있다. 오우! 어떻게든 별일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고 결국엔 우리는 모두 All Is Well.
크라잉 넛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밴드라는 것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그 의미가 깊다. 멤버 교체 한번 없는 그들은 여전히 젊다. / 크라잉 넛의 25주년 기념 베스트 음반.
<'그래도 너는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크라잉 넛 - 좋지 아니한가)>
고등학생 때,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그래도 너는 좋지 아니한가!'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일말의 긍정적인 모습을 기대하는 크라잉 넛의 외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아주 가끔은 위로가 필요해.'라고. 위로를 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머리와 마음을 타고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전해지는 것 까지는 상당히 어렵고 도착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고객도 있기 마련이라서 또 어렵다.
이번만큼은 위로를 받는 입장이 아닌 위로를 주는 입장이 되어보자. 무릇 위로란 '댁에 안 계셔서 여기 '위로 한 마디' 놓고 갑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전달한 위로가 원하는 만큼의 '효과'를 내주지 않으면 미칠 노릇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야 한다. '책임'을 진다는 느낌이라면 조금 와닿을까? 상대방을 위한(혹은 향한) 책임은 일상에서 약간의 무거운 마음을 가지게 한다.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마음, 학생들을 맡고 있는 담임 선생님, 자신의 분대를 통솔하는 분대장 등 무언가를 맡고 있다면 뒤따르는 책임이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라거나 선생님이 되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어쨌든 위로는 진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해가 없어야 하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조금은 필요하다. 그냥 업무를 마치고 흔히 듣는 "수고했다."는 나의 힘듦을 보상받는 위로가 아니다. 그냥 인사치레일 뿐, 적어도 위로를 해주는 입장이라면 한번쯤 진심을 다해보자.
30여 년 동안 농축된 삶의 개똥철학 글에서 읽는 이에게 무미건조한 삶을 조금이라도 이겨낼 수 있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혼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꼭 당신과 함께 하겠다. 반대로 내가 무미건조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대가 꼭 나와 함께하면 된다. 화이팅!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