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며

머리와 손가락의 합을 맞추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에요.

by 좋은음악수집가


저... 치고 싶은 곡이 하나 생겼어요.


바이엘을 뗀 내가 호기롭지만 약간의 조심성을 가지고 용기를 냈다. 바이엘을 뗐는데 제대로 칠 만한 게 사실 뭐가 있겠냐만 예로부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고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다. 근데 실력이 받쳐줘야 뭐라도 하지 피아노 앞에서는 손과 머리가 따로 노는 데다 낮은음자리표 음표도 찾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그런 수준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어떤 곡이에요?"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요. 할 수 있겠죠?"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선생님과 대화를 마치고 2번 연습실에서 홀로 뚱땅거리며 연습을 하고 있는 중에 악보를 뽑아오셨다. 정말 빠르시다. 학생의 니즈(needs)를 빠르게 채워주셔서 황송하였다. 하지만 나열된 악보들은 자비가 없었다.


'쉬워요' 라니... 잠깐만요 저는 이제 막 바이엘을 뗐는데요?


가끔은 "왜 일을 만드니..."라는 푸념과 "왜 사서 고생을 하니?"라는 탄식을 주변인들에게 종종 듣는다. 이 악보를 받은 순간 딱 여기에 적합했다. 그냥 보기 좋게 나의 예상을 건너뛰었다. 조금 더 생각하고 말을 해야 했다. 조금 더 실력이 늘어간 후에 말을 꺼냈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한들 어찌하리 악보는 벌써 나의 눈앞에 펼쳐졌고 가지런히 피아노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천천히 도입부를 쳤다.


'황홀하다. 가슴에 음표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나는 초보니까...'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한마디, "잘 치시면 인스타그램에 올려드릴게요~"

선생님, 6개월이나 걸릴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셔야 할 듯합니다.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물론 연습도 많이 해야죠.




새롭게 피아노를 배운 지 5개월이 지났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복습'의 중요성이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 운동, 공부 등에서 배운 것을 복습한다는 것은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정말 늦게 알아버린 만큼 배운 것들을 소홀히 하지 않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열심히 해야 해요... 어릴 때는 제 돈으로 한 게 아니지만 지금은 제가 학원비를 감당하니까요."


그래 맞다. 학원비를 누가 내주랴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한마디로 '뽕'을 뽑아야 한다. 아마 성인이 되어 자신의 월급의 일부를 투자하여 자기 계발에 쏟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날의 시간이 허락한다면 조금 더, 10분만 더, 1분만 더 실력 향상을 위해 쏟을 것이라는 것.


특별히 야근 사유가 없으면 정확하게 칼퇴근하여 학원에 도착하면 18시 10분 정도가 되는데 그때부터 피곤한 몸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배운 코드를 한 번씩 쳐보고 머릿속에 있는 쉬운 코드로 이루어진 음악을 피아노를 치며 음미(?)한다. 역시 코드를 기타로 먼저 익힌 나로서는 코드 반주가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할 때는 머리가 아파온다. 처음 악보를 받고는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감을 못 잡아 매번 메치기 당했지만 연습의 연습을 거듭하여 연습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머릿속에 악보가 그려지고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입력이 되었다.




요즘 내가 배우는 반주법을 담은 책 그리고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악보가 담긴 파일.


여전히 잘 다니냐고 물으신다면 "바쁘지 않으면 꼬박 출석합니다."라고 대답해드리겠다. 성인반 출석률 중에서 가장 높은 출석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오죽하면 근무지에서 '본인과 가장 안 어울리는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다. 투박하게 생긴 외모와 피아노가 안 어울리긴 하지... 아니 그럴 거면 헤비메탈 밴드라도 결성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서 헤비메탈 밴드가 나올 확률보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살면서 가장 울림이 되었던 말이 있다면 중학교 2학년 시절의 한문 선생님, 강남영 선생님의 말씀이었는데 당신께서 학생들에게 강조하셨던 것은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3운동, 3악기'였다. 세 가지의 운동과 세 가지의 악기를 어깨너머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해라!"라는 말보다 더욱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물론.. 운동은 즐길 정도로 하고 악기도 밴드에서 다루는 악기를 조금씩 다룰 줄 알지만 (가야금까지!) 피아노까지는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은 선생님의 울림이 여전히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곡을 제대로 완곡할 날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연습을 게을리했다기보다는 바쁜 탓에 피아노 학원을 자주 못 갔다는 것도 핑계라면 핑계다. 그래도 갈 수 있을 때는 꼭 가서 오래 연습하는 것을 원칙으로 지금까지 잘 이어왔다. 혹시 모르죠... 언젠가 보여드릴 날이 있지 않겠어요? 그날을 꼭 기다려주세요. 언젠가 제대로 보여드리죠!



Richard Clayderman - Ballade Pour Adeline (1977)

리차드 클레이더만이 60세가 되던 2013년에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만들어진 영상이다.


한국인이라면 TV에서 나오는 광고, 라디오 아니면 우연히 백화점 등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가 유치원을 다녔던 시절이었고 이 곡의 제목을 알아내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 들었던 그 아름다운 선율을 잊지 못한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는 1976년, 작곡가 폴 드 세느빌(Paul de Senneville)의 둘째 딸, 아드린느를 위한 곡을 만들었고 이 곡을 연주할 피아니스트를 구하던 중 무명의 리차드 클레이더만이 오디션을 보게 되는데 이 곡을 계기로 그는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삶이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77년, 리차드 클레이더만은 이 곡이 담긴 싱글 <Ballade Pour Adeline>을 발표하여 전 세계적으로 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어떤 악기가 사용된 곡이 히트를 기록하게 되면 해당 악기의 매출이 급등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슈퍼스타 K 같은 경우에는 어쿠스틱 기타의 매출에 엄청난 공헌을 했으며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의 히트는 당시 피아노 판매에 공헌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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