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를 참 좋아한다. 물론 '역사 덕후'급처럼 역사적 사실을 두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정도는 아니고 그냥 역사 속에서 빼먹을 수 있는 재미난 에피소드를 좋아할 뿐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나 삼국시대, 조선시대를 비롯한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정말 새발의 피다.
그냥 어린 시절 KBS에서 했던 <역사스페셜>이나 MBC에서 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프로그램을 아버지 옆에서 멀뚱멀뚱 보는 걸 좋아했고 청소년기에는 아버지와 역사로 대화를 나누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물론 옆에 있던 동생은 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대화에 끼질 못했다는 것은 덤.
나는 어느 아티스트의 음악에게 꽂혀 몰입을 하다 보면 관련 자료를 무진장 찾아본다. 이 음악이 나왔던 년도부터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아티스트의 처한 환경 등을 알게 되면 음악이 더욱 잘 들리는 것처럼 느낄 정도인데 이 작업은 아티스트의 국적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활동하는 아티스트라면 SNS나 이메일을 알아내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연락을 취할 때도 있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귀찮게 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를 가해서는 절대 안 되고 괴롭힘 자체에 선이 어디 있겠냐만 절대로 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괴롭히다'와 '귀찮게 하다'는 타인을 짓밟는 행위가 아닌 제자가 스승님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답을 얻고자 하는 그런 행위인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참 좋아졌다. 책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자를 검색하거나 SNS를 찾아내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바로바로 답변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그 책을 쓰신 작가님을 참 많이 '괴롭혔다'. 정말 다행스러웠던 것은 친절히 답변을 모두 해주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한국 대중음악 평론가이신 '최규성' 선생님이다.
Vinyl(우리가 흔히 아는 LP판이 바로 '바이닐'이다. 편의상 LP로 표기하도록 하겠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대학생 때다. 다시 유행이 올 것이라는 직감을 했지만 생각보다 느리게 유행을 탔다. 대구의 중심, 흔히 '시내'로 불리는 동성로를 갔을 때의 일이다. 레코드샵이라는 곳이 거의 없을 때였고 있다고 해도 CD를 파는 교보문고 지하 1층에 위치한 핫트랙스에서 새로 나온 음반들을 구경하다가 CD를 사는 것이 전부였다.
2011년으로 기억한다. 핫트랙스에 김정미의 NOW가 LP와 CD가 함께 진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 음반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때는 LP가 그렇게 유행하던 시절도 아니었거니와 턴테이블조차 인기 제품이 아니었다. (지금 턴테이블이 굉장히 인기가 있는 것으로 보면 격세지감이 따로 없을 정도...)
2011년, 싸이키델릭 리이슈 전문 레이블 Lion Production에서 발매한 김정미의 <NOW> LP와 CD. 나는 이 음반을 한달 간격으로 구입했다.
당시 도서관에서 한 달을 일하면 통장에 들어오는 급여가 36만 원이었다. 이 36만원을 가지고 한 달을 살아야 했는데 대학생의 36만원은 나갈 구멍이 너무도 많다. 술은 원래 마시지 않기에 큰 지출은 없었지만 끊어지는 기타 줄도 동아리 회비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치킨값도 평일에 먹는 점심, 저녁도 이리저리 생각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월급을 받는 날에 바로 수업을 마치고 바로 버스를 타고 갔다. 그날은 약속이 잡혀도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누가 구입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버스에서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리고 여전히 팔리지 않은 저 음반과 마주 했을 때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에 두 장을 같이 살 수없었다. 한 달을 살아야 하는 비용에 LP와 CD를 합친 가격이 거의 7만원이었기 때문에 LP부터 산 후 다음 달 월급을 받자마자 CD를 구입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한 달의 기간 동안 음반이 팔리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근데 턴테이블은 언제 사지?
정말 바보같이 턴테이블도 없는 주제에 CD가 아닌 LP를 먼저 샀다는 것이다. 괜찮다. 그저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했다. 턴테이블이야... 또 도서관에서 계속 일하면서 언제라도 구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턴테이블이 내 자취방에 들어오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꽤나 오랜 시간을 김정미의 <NOW>는 미개봉인 채 그대로 있었다. 턴테이블이 생기기 전까지는 손님이 오시면 그냥 보여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행복이었다.
조금은 허접할 수 있는 턴테이블을 구비해놓고 몇 장 되지도 않는 LP판을 돌렸을 때, 특히 김정미의 NOW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동이었다. 물론 허접한 탓에 수명이 다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지금이야 이전에 비해 훨씬 괜찮은 턴테이블과 앰프와 스피커가 나를 맞이해주니 그걸로 만족스럽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의 새벽 출근길에 가끔씩 <햇님>을 청한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감싸는 그 시점에 햇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그 순간의 쾌감을 느낀다. 행복이 따로 있을까? 출근하는 시간이 행복하면 그것만큼 축복이 없다. 쉬는 날 아침을 깨우는 곡으로도 으뜸이니 쉬는 날 아침 커피 한잔과 함께 정주행 해보는 것은 어떨까?
(좌) 예전미디어 에서 재발매한 제일 최신 복각판, (우) 2009년 리듬온에서 재발매한 음반에는 7인치 복각판이 있었는데 이것만 지인에게 선물을 받았다.
김정미는 신중현 선생님의 '페르소나'라 불릴 만큼 신중현 선생님의 창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비음(鼻音)을 사용하여 싸이키델릭의 정점을 목소리로 찍을 만큼 김정미의 목소리는 독보적이다. 나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자신의 아버지가 음반 수집을 하신다고 하여 울산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그때 친구의 아버지와 나는 '신중현'이라는 주제로 1시간 이상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내가 "아버님, 저는 신중현 사단의 최고는 김정미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에 감탄하시며 소주를 드시던 장면이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도 김정미에 대한 재평가는 꾸준히 진행 중이며 2018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김정미의 NOW는 사상 최초로 58위에 랭크가 되어 음악성을 늦게나마 인정을 받은 셈이다.
솔직히 좋은음악수집가의 첫 LP이기도 하여서 모든 곡을 추천하고 싶지만... 그래도 몇 곡만 추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김정미 - 햇님 (A면 1번 트랙)
신중현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밴드를 많이 만들었고 음반마다 함께하는 밴드의 연주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ADD4(애드-훠) 이후 신중현과 덩키스, 신중현과 퀘스천스, 신중현과 더멘, 신중현과 엽전들, 신중현과 뮤직파워, 신중현과 세나그네 까지 이르는 동안 신중현은 그의 기타와 송라이팅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나 싸이키델릭 록에 있어서 최고점에 이르는 밴드는 1970년에 들어선 밴드 중 신중현과 더멘은 지연, 윤용균, 박광수, 장현, 김정미 등 신중현 사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햇님>을 설명하기 전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은 이유는 이렇게라도 설명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김정미 라는 가수를 알고 처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듣게 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섬세한 기타 선율은 마치 추웠던 새벽을 서서히 뚫으며 올라오는 따스함이 느껴지고 김정미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중반부에 흘러나오는 오보에와 현악기의 어우러짐은 어느새 따스한 태양이 온 세상을 감싸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싸이키델릭이 퍼즈 이펙터를 사용하지 않고도 듣는 이를 다른 세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으며 이 곡이 1973년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20대의 나에겐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김정미 - 봄 (A면 3번 트랙)
신중현과 더멘은 신중현(기타, 작사, 작곡), 이태현(베이스), 김기표(오르간), 문영배(드럼), 손학래(오보에, 색소폰)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주력으로만 봤을 땐 오랜 시간 합을 맞춘 것 같은 대단한 실력이지만 이들이 함께 있었던 시간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베이시스트 이태현 만 신중현과 꽤 오랜 시간 함께했다.)
1973년에 있어서 '봄'은 어떤 의미일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봄, 모두가 기다렸던 그 따스함의 시작이 아닐까? 1970년 대의 신중현은 금지곡이 제일 많은 작곡가였고 발표하는 곡마다 금지가 되는 어려움을 겪어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언젠가 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곡이 바로 이 곡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위의 곡과 함께 이 음반에서 유이하게 오케스트라 선율이 나오는 곡이며 햇님과 함께 이 곡은 먼저 싱글로 발매되기도 했고 2009년, 리듬온에서는 이 싱글을 복각하기도 했다.(위 사진 참조)
김정미 - 가나다라마바 (B면 마지막 곡)
사실 이 곡은 1972년, <김정미 최신가요집>에 먼저 수록되고 1973년에 다시 녹음하여 수록하였다. 두 곡을 비교하며 들어보는 것도 쏠쏠하다. 시원시원함이 일품인 72년 버전과는 달리 힘을 빼고 나긋나긋 하면서도 비음을 최대한 강조했다. 싸이키델릭 함을 위한 김정미의 창법 변화는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코러스의 목소리는 같은 창법을 내는 신중현이다. 72년 버전과는 다르게 과하지 않고 딱 필요한 순간에만 딱 등장하는 것도 비교해서 들으면 티가 난다.
송창식의 <가나다라>(1980)보다 훨씬 오래전에 나왔으며 신중현 식의 국어사랑(?)을 느낄 수 있는 중독성이 강한 곡이다. 중독성은 강하지만 매니아 층에서는 크게 사랑받는 곡은 아닌 것 같다. 햇님과 봄이 워낙 임팩트가 강한 탓인지 이 곡은 음반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있다. 80년대의 음반의 마지막은 '건전가요'가 장식을 했는데 어쩌면 신중현 표 '건전가요'인 셈이다. 정말로 가사가 건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