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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서리 Mar 07. 2023

어떤 여정#5

이 사람은 드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가벼운 약속 하나였다. 아주 오랜만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간만에 만나자는 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 사람은 나름대로 사회적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 움직였다. 몸을 씻고, 단장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위해 문 앞을 메우고 있는 쓰레기봉투들을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쓰레기들은 이 지긋지긋한 방구석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 좁은 방구석을 벗어나게 된 이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해를 마주했다. 따스한 햇살이 참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걷는 터라 다리를 움직이는 감각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찬찬히 움직였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반갑게 이 사람을 맞아주었다. 이 사람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너무도 반가웠다. 자신에게 존재하는지도 잊고 지냈던 많은 감각과 감정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간만에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자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외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마치 굳어 있는 혀를 풀어주듯 처음에는 아주 느릿하게 말했다. 지인은 이 사람에게 그간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물었다. 이 사람은 문득, 그리고 새삼스럽게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그냥 쉬고 있었다고 답했다. 지인은 쉬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답했다. 자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쉼’의 정도를 넘어선 침울한 생활을 했지만 그 부분은 구태여 언급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넘겨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제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인을 보고 있자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고 생각이 자꾸 다른 곳으로 샜다. 자신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지인이 이 사람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묻자 생각도, 말도 모두 멈춰버렸다. 아무것도 답할 것이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잠깐 망설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부끄러워서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인도 이를 눈치챘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뭐든 급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천천히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이라고. 이 사람은 알겠다고 답하기는 했으나 사실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조급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잔한 위로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자신을 생각해서 위로의 말을 던지는 상대에게 너무 실례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곧이어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여 이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러나저러나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이 사람은 고민을 하다 다시 일기를 써 보기로 했다. 노트를 꺼내고 연필을 잡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갔다. 지인을 만난 일, 만나서 나눈 대화, 떠올랐던 생각들. 저번에 썼던 고작 세 줄짜리 일기와는 다르게 한 페이지를 꽉 채웠다. 이 사람은 다시금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가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눈앞에 그 중요성의 증거가 한 페이지 가득 있지 않은가. 이 사람은 다시금 다짐했다. 내일부터는 무엇을 하든 움직일 것이라고.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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