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오리 Nov 22. 2019

국가 폭력의 피해자를 통해 본 인간의 존엄성

서평 <폭력과 존엄사이> 은유 (오월의봄, 2016)

<폭력과 존엄 사이>(오월의 봄,2016)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진실을 밝히는 시민단체 ‘지금여기에’가 기획하고 은유가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를 인터뷰 해 엮은 책이다.  <쓰기의 말들>, <글쓰기의 최전선>, <출판하는 마음>,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 산문집과 인터뷰집, 르포 등을 꾸준히 발표해 온 저자는 2017년 조선일보 선정 올해의 저자 10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은유는 인터뷰집 발간 제안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지만 국가의 폭력이 아니라 사건 이후 ‘존엄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기획의도를 듣고 집필을 결심한다.


1974년부터 1986년에 걸쳐 간첩으로 몰려 억울함을 입은 일곱 명의 신상은 다양하다. 온 가족이 ‘삼척 고정 간첩단’으로 몰려 5년형을 받은 김순자(1945년생), 동경대 박사학위 출신의 수의사 이성희(1926년생), 결혼 후 일본으로 갔다가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간첩으로 몰린 박순애(1930년생), 뱃일도중 북한에 끌려갔다온 일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간첩이 돼버린 김흥수(1936년생), 4.3 항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일하러 일본에 갔다가 누명을 쓴 제주사람 김평강(1940년생), 노동운동 중 만난 대학생 친구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받은 고 심진구(1960년생), 역시 뱃일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일로 간첩이 돼 버린 김용태(1957년생)가 그들이다. 일하던 보험설계사 사무실에서, 대학의 연구실에서, 모진 타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마치 ‘무처럼 뽑혀’나간다. 


‘군부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심해질 때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가 경쟁적으로 재일동포 관련 간첩사건을 발표했다.’(p.63) 엄혹한 시절은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 그 삶은 쑥대밭이 된다. 온갖 고초를 겪은 인터뷰이들은 그야말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채 내동댕이쳐진 삶을 살게 된다. 김흥수의 부인은 ‘생선 팔 때도 울고 생선 판 돈으로 보리나 쌀 사서 집에 들어갈 때도 울고. 집에서는 울지 못하죠. 내가 울면 애들이 타닥타닥 우니까 집에서 울지 못해’(p.115)라며 지난세월을 회상한다. 무엇보다 괴로운것은 억울함.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실형을 받고 징역을 살고 공동체에서 내쳐짐을 당한다. 김평강을 담당했던 검사는 ‘모든 것이 애매합니다만 사형에 처해주십시오.’(p.147)라고 말하고 김용태 사건을 맡았던 판사는 아무도 없는 재판장에서 비밀리에 선고를 내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다’(p. 213)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 ‘살아 있으니 산 것이다’(p.46)라고 하며 치열하게 삶을 이어간 이는 타인에게 시선을 건네게 된다. 모진 세월을 견뎌낸 김순자는 세월호를 보며 눈물짓고 ‘힘없는 약자들이 말없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눈뜬다. 박순애 또한 ‘묵묵히 참다보면 진실은 오고야 만다. 절대, 진실은, 언제고, 진실이 이긴다는 거. 그걸 나 깨달았네.’(p.105)라고 말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은 기나긴 시간이 흐른 후 진실규명신청을 통해 느리게나마 벗겨진다. ‘한 사람이 살 만한 시간을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에 기대어 살았다는 말과 같다.’(p.152) 영겁 같은 고문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밖에서 버텨준 부인이기도 했고(이성희, 김흥수) 동문들이기도 했고(김평강) 타국의 지인이기도 했다(박순애). ‘억울하겠다고 하고 마쓰오카  상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나를 믿어주고 잘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일본 가고 싶당께.’(p.107) 


저자는 수전 손택의 글을 인용하며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을 인정하고 도덕적으로 모자란 상태에 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들으며 ‘부정하고 환멸하며 덮었다가 다시 펼쳐 한줄 한줄 정독하고 파악하기를 반복했다’ (p.11) 타인의 삶을 자신 안에서 녹여보려는 노력은 결국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과 고통으로 쓰여진 이 책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사는 우리들에게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그늘을 보여준다. 국민을 지켜야하는 국가가 폭력으로 그들을 구속할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증언한다. 마지막 부록의 연표에는 인터뷰이 각자의 이력과 대한민국의 정치적 사건들을 한데 묶었다. 이를 보면 개인의 역사는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1974년 이후 이 책에 실린 모든 조작사건은 시작되었다. 또한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써내려간 간첩 조작 사건 무죄 목록은 건국후 얼마 되지 않은 1948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까지 이어져온다. 남과 북으로 갈리게 된 이후, 체제를 유지하기위한 기만적인 간첩 조작사건은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군부독재시절의 경제개발이 없었다면 지금의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생이 뿌리 뽑힌다면 그것은 결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다.’1)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존엄을 가능하게 하는 단초다. 삶에서 뿌리째 뽑혀지는 경험을 했던 인터뷰이들은 존엄을 잃지 않고 타인을 위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원한을 품어서 복수하려고 하지 말고. 그런 마음이 생기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게 좋지 않나. … 원한은 있지만 상대방을 싸움으로 하지말고 말로 좋게 화해하는 게 다음 세대들이 행복한 거에요.’(p.159) 인권의 회복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의 삶에 들어가 보는 것으로 나의 존엄 또한 가능해 질 수 있는 것이다. 


1) <타인의 고통> p.154 수전 손택, 이후 2004

작가의 이전글 볼 수 없는 수많은 빛 중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