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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19. 2019

’자서전’이라 쓰고 ‘소설’이라 읽는다

한 소설가의 '자소설'

-서평 <사실들> 필립로스/민승남 (문학동네,2018) 


해마다 10월이면 문화계에는 노벨문학상 부문 주요 후보작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미국의 필립 로스도 단골로 등장하던 작가 중 한명이다. 아쉽게도 2018년 타계해 더 이상 그의 이름을 후보명단에서 볼 수는 없겠지만, 저명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이 미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중 한사람으로 필립 로스를 꼽았을 정도로 그의 작품이 이룬 성취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들은 개인적 가족사를 바탕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번역가 정영목은 그의 에세이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에서 그의 소설이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며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쓰여지는 작업임을 말한다. 


자서전적 에세이 <사실들>(문학동네,2018)은 작가가 살아가며 겪은 이런저런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대인 가족의 울타리에서 사랑받는 둘째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가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유대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성실한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가정 밖에는 유대인/비유대인의 차별이 존재했다. 아버지의 성실함은 대형 보험회사의 지점장까지 승진을 가능케 했지만 거기까지였고, 학교와 거리에서 보여지는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은 그의 평화로운 소년시절의 유일한 재앙이었다. 집을 벗어날 수 있게 한 대학생활은 좌충우돌 에피소드-여자친구 폴리와의 애정행각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사교클럽, 문예지 창간과 운영,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우게 된 세미나 이야기 등-로 반짝거리는 청춘의 생생함을 보여준다. 이후 만나게 되는 첫번째 부인 조세핀 젠슨(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실명이 아니라고 밝힌다)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며 작가의 작품세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그녀의 암울한 배경과 그 배경을 등질 수 있게 한 독립성에 끌리지만 결혼 이후 그녀와의 투쟁은 배우자와의 법적 권리를 ‘국가와 사법부에 맡겨선 안된다’는 각인을 그에게 남긴다. 작가의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이후 다시한번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남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서른다섯의 시기에서 끝을 맺는다.


이 책의 백미는 서두와 말미에 배치한 편지글이다. 작가는 소설속 페르소나인  주커먼에게 보내는 글 형식으로 서문을 연다. 신경쇠약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걸려 감정적, 정신적 붕괴의 벼랑 끝까지’(p14) 가게 된 작가는 자신의 시작점을 돌아보며 창작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자신의 경험과 상황을 상상력으로 증폭하여 ‘윤색하고 재배열하고 확대해 일종의 신화를 만드는 일’(p16)을 계속해 온 작가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해부를 통해 슬럼프에 빠진 창작의 열정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에 대해 주커먼은 이책을 출판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그의 이야기는 자신, 즉 소설적 자아를 통해 나와야만이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자네의 재능은 자기 경험을 개인화하는 게 아니라 의인화하는 것, 자신이 아닌 인물을 내세워 그것을 구현하는 것에 있지.”(p234). “자네에게 진짜로 무자비한 자기 적출, 진정한 자기 분석의 도구는 나일세.”(p269) 


결국 작가는 주커먼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소설에 대해 말할 때보다 사실들에 대해 말할 때 자신들이 더 확고한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느낄까? 사실들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들고 결론도 잘 나지 않으며, 상상력이 일깨우는 탐구심을 죽일수도 있는데 말이야.”(p240)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을 써온 작가는 그의 경험을 소설을 쓰기 위한 상상력의 불가마속 연료로 사용함으로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해 독립성을 지니게 한다. 주커먼이 작가와 동등한 존재로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러한 의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 소설가의 자서전’이라는 부제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데, 자서전의 주체인 자신을 ‘한 소설가’로 객체화 해 ‘자서전’의 형식을 띤 ‘소설’로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견을 자신의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 등장인물과 나눈다. 자신의 경험을 가상의 인물, 가상의 공간으로 끌고 들어가는 메타픽션으로서의 ‘자서전-소설’은 자신의 삶을 창작의 도구로 사용해 온 소설가의 자기선언이자 선전포고로 보인다. ‘많은 독자들이 고백으로 위장한 소설을 소설로 위장한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심판한다’라며 씁쓸해 했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작품의 근원과 방향을 펼쳐보인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실들이 있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야기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아닐까? 자신의 인생과 경험을 갈아넣어 작품을 만들어내는 필립 로스의 ‘자서전’은 소설가가 어떻게 세상을 탐험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그가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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