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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16. 2019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를
어루만지다

서평<잉글리시 페이션트> by 마이클 온다치 /박현주 (그책, 2018)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끝나갈 즈음 이탈리아의 수도원 빌라 산 지롤라모에 각각 다른 출신성분을 가진 네 사람이 모여 살게 된다. 모든 것이 불타버려 이름도 소속도 알 수 없는 ‘영국인 환자’와 그를 돌보는 젊은 캐나다 출신 간호사 ‘해나’, 그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카라바지오’ 아저씨, 적군이 남기고 간 폭탄을 해체하기 위해 파견된 인도 출신 영국군 공병 ‘킵’은 모두가 떠나고 황폐해진 빌라에서 생활을 이어간다. 네 사람은 각각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전쟁을 통과해간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며 각자의 생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 <잉글리시 페이션트>(그 책, 2018)는 마이클 온다치의 1992년 작품이다. 스리랑카 출신의 캐나다 국적인 작가는 전쟁 이야기와 사막에 추락한 비행기에 대한 막연한 설정에서 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더욱 유명해진 이 작품은 1992년 맨 부커 상 수상작이다. 또한 2018년 맨 부커상 50주년 기념으로 역대 맨 부커상 수상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에게 수여하는 ‘황금 맨 부커상’도 수상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전쟁을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아닌 주변 국적의 사람들이다. 캐나다 국적이면서 유럽의 전쟁터에 뛰어든 간호사 해나는 전쟁 중 숨진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지닌 채 모두가 철수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홀로 남아 영국인 화상환자를 간호한다. ‘어떤 남자들은 그녀의 팔 안에서 인생의 마지막 매듭을 풀고 갔다……. 그녀는 근무를 계속했지만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개인적인 자아는 점점 뒤로 물러났다.’(p.251) 그녀는 ‘전쟁의 시녀’로 소모되어간다. 그녀가 돌보는 영국인 환자 또한 사실은 헝가리인 ‘알마시 백작’으로 뛰어난 사막의 탐험가인 동시에 독일군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였다. 그는 영국 지리학회의 의뢰로 사막을 탐험하는 도중 영국인 유부녀 캐서린과 불륜에 빠진다. 사고로 부상당한 캐서린을 구하기 위해 영국군 진지인 엘 타지로 향하지만 적진의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는다. 편 가르기에 의한 전쟁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부수어버린다.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나는 빼앗겼습니다.’(p.365) 해나와 사랑에 빠지는 ‘킵’ 또한 인도인이면서 영국군으로서 공병이라는 특수한 역할로 전쟁에 사용된다. 폭탄을 해체하는 일은 전쟁을 소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하고 킵은 절망한다. 해나의 아버지 패트릭과 친구인 카라바지오는 해나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에서 온 도둑이며 연합군의 스파이이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나치에게 붙잡혀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절단당한 후 모르핀에 중독된다. ‘전쟁은 그에게서 균형을 앗아갔고, 그는 모르핀에 절은 가짜 팔다리를 단 현재 모습을 가지고는 다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p.168) 전쟁의 무자비함과 혹독함은 헤어 나오기 힘든 늪처럼 모든 삶을 삼켜버린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등장인물들의 실체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다. 전쟁으로 인해 만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유사가족이 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을 통해 생명력과 인간성을 회복한다. ‘안식을 주는 유모의 사랑’은 킵에게서 해나에게로, 등을 긁어주는 ‘다정한 기술을 대접’함으로 전해진다.(p.314), 시적인 문체 또한 깊이를 더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은 피부를 떨쳐버렸다. 그들은 오로지 진실한 자기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흉내 낼 수 없다. 아무런 방어벽이 없이 다른 사람 안에서 진실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p.169) 때때로 인용부호 없이 등장하는 대화나 독백은 스토리의 진행보다는 내적 감정 선을 중시한다. 선명한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선호도가 다를 수 있다. 


한편 치밀한 구성은 돋보인다. 스쳐 지나갔던 설정들은 인물의 깊이를 만들어 내는 단서들이다. ‘많은 책들은 질서에 대한 작가의 확신과 함께 시작한다. 어떤 책은 소리 없이 노를 저으며 그들의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p.132) 작가는 비선형(非線型)적인 정보의 제공으로 독자가 스스로 사건과 인물을 재구성하도록 만든다. 페이지 곳곳에 배치한 작가의 의도는 겨자씨같이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읽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인물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작품 자체의 생명력을 만들어낸다. 50년의 맨 부커상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이 출판사 ‘그 책’의 ‘에디션 D’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의문이 든다. 출판사에 따르면 에디션 D는 인간의 에로티시즘과 욕망을 말하는 문학시리즈라고 하는데, 이 책이 그중 한 권으로 선택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 중간중간 발견되는 띄어쓰기 오류도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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