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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15. 2020

노동으로 새긴 이 시대의 기록

서평 <임계장 이야기> by조정진(후마니타스,2020) 

아르헨티나의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인 산티아고 그라소가 감독한 <El Empleo (The Employment)>1)에는 노동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있다. 아침에 일어난 남자가 출근하기 위해 만나는 모든 이벤트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침대 옆 스탠드도, 화장실의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택시정류장에서 만나는 택시도(그는 남자를 업고 뛴다), 길거리 신호등도 사람이다. 6분이 조금 넘는 애니메이션은 ‘고용’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타인을 고용한다는 것, 그리고 고용 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라는 부제의 <임계장 이야기>(후마니타스, 2020)는 노동 현장 한 복판에서 온 몸으로 겪은 고용, 그중에서도 비정규 최저시급 고용의 실태를 보여준다.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준말이다. 


저자 조정진은 38년간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한 후 2016년 정년을 맞아 퇴직하게 된다. 풍족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노후대책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학자금대출과 주택담보대출, 아들의 전문대학원 진학 등으로 변수가 생긴다. 친척의 도움으로 중소 광고 회사의 사무직 일자리를 소개받지만 낙하산 신입사원의 많은 나이는 ‘원죄에 가까운 것이었다’(p.17). 결국 생활정보지의 구인광고를 통해 시외버스 회사의 배차계장으로 취직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후 저자의 경제활동은 고난의 연속이다. 버스회사 배차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관리원 겸 경비원을 거쳐 버스터미널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모든 경우 자신의 의지로 일터를 그만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근무 중 입은 부상의 치료를 위한 무급휴가를 달라고 해서, 아파트 자치회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본부장 사모님의 주정차 금지구역 주차를 방해해서 해고를 당한다. 24시간 격일 근무를 두 곳에서 매일 하는 등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던 저자는 결국 야간 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퇴근하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편리한 아파트 생활의 이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비원의 노고가 있다. 경비일 이외에 각종 쓰레기 분리수거, 주차관리, 각종 잡역과 심부름, 주민들의 갑질까지 감당해야 했던 저자는 우리가 공기처럼 느꼈던 경비원의 수고로움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알게 해 준다. ‘쓰레기 청소처럼 몸으로 때우는 일은 힘들 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슈퍼맨이 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수십 가지 비정형적 업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주어졌다.’(p.64) 그가 이런 힘든 일들로 받게 되는 임금은 시급 6030원. 그나마도 일터에서 짤릴까봐 전전긍긍 해야 했다. 그의 또다른 별칭은 ‘고.다.자’.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는 뜻이다. 저자는 우리 주위에 널리 퍼진 비정규직의 현실과 아픔에 대해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정작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육체적인 고단함보다는 배려 없는 갑질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경비원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경비원은 제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스위치 같았다.’(p.100) 여러 가지 갑질사건으로 괴로와하던 그는 동료 경비원에게 ‘경비원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듣고 고통에서 해방된 기분이 들 정도로 피폐해진다. 인간에 대한 적의마저도 느껴지는 이러한 갑질들에 대한 낱낱한 기록은 읽는 이에게조차 고통으로 다가온다. 


‘내가 일했던 모든 시급 일터에서 고용주의 요구는 항상 똑같았다. “최저임금으로 최고의 노동을 바쳐라!” 고용주들이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시급 노동 인력들이 넘쳐 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이 나라는 가장 적은 임금으로 가장 혹독한 일을 시킬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p. 250) 저자는 자신의 언어로 직접 겪어낸 노동현장의 현실과 자신의 생각을 글에 담았다. 혹독한 근무환경 속에서도 그는 기록을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틈틈이 메모한 수첩들은 책이 되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 놓았다. 개인적인 고난 서사를 넘어 이 시대의 한 단면을 대변한 그의 기록은 글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말한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타인들의 고용상태를 자의 반 타의 반 누리며 직장에 도착한 남자는 어느 문 앞에 도착해 바닥에 엎드린다. 이윽고 도착한 또 다른 타인은 남자의 등을 밟고 신발을 문지른 후 방에 들어간다. 남자의 일, 곧 직업은 신발매트였다. 우리는 모두 타인을 위해 일한다. 일하는 타인에 대한 존중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다르지 않다. 



1)

 https://youtu.be/cxUuU1jwM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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