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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l 14. 2020

시인은 어떻게 혁명을 관통했는가

<닥터지바고>(열린책들, 1990)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데이비드 린 감독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다.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적인 환경으로 충만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곡가 스트랴빈등과 가깝게 지내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글쓰기, 특히 시작(詩作)에 몰두하게 된다. 상징주의 경향을 보였던 그의 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인텔리겐챠의 전형 또는 유약함으로 비추어져 비난받기도 하지만, 작품이 내포한 예술성은 그를 러시아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잡게 한다. <닥터지바고(상,하)>(열린책들,1990,전자책)는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1945년부터 1956년에 걸쳐 집필된 작품이다. 검열에 의해 소련에서의 발표가 금지된 이 작품은 1957년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번역 출판되고 1958년 ‘동시대 서정시와 러시아 서사문학의 위대한 전통의 계승에 기여한’ 업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유리 안드레이비치 지바고’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그로메꼬 집안에서 ‘또냐’와 함께 자라며 의학을 전공한다. 한편 ‘라리사 표도로브나’(라라)는 영민한 학생으로 홀어머니와 살며 같은 학생인 ‘빠샤 안찌뽀프’와 연인 사이다. 어머니의 후원자인 ‘빅토르 꼬마로프스키’에게 농락당하게 되자 수치심에 괴로워하던 라라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 그를 찾아가 총으로 쏜다. 이 사건으로 파티장에 있던 지바고는 그녀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1차 대전이 발발하며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한 유리는 남편 빠샤를 찾기 위해 간호부로 지원한 라라를 다시 만나고 그녀에 대해 호감을 느낀다. 종전 후 혁명정부가 들어선 모스크바로 돌아온 유리는 지식인 계급에 적대적인 인민을 피해 부인인 또냐와 아들 샤사, 장인인 ‘알렉산드로비치’와 함께 그로메꼬가의 영지 바리끼노로 향한다. 적막하고 단출한 전원생활을 누리던 그는 근처 도시인 유라찐의 도서관에서 라라를 다시 만나며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또냐와 라라 사이를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던 유리는 빨치산에게 사로잡히며 뜻하지 않게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시인이기도 했던 파스테르나크는 주인공인 지바고를 페르소나로 삼아 그 자신이 느꼈음직한 혁명의 무자비함과 누추함을 역설한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은 그들의 외관이나 말과는 판이했는데, 이것은 그 시대의 질병이요, 혁명적 광기였다. 분명한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자신은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숨은 범죄자이며 아직 발각되지 않은 협잡꾼이라는 느낌을 정당화시킬 수가 있었다.’(하권 14장 16) 직접 혁명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스뜨렐리니꼬프(저격자라는 뜻)로 불린 빠샤와 달리 지바고는 혁명이나 이념보다는 삶 그 자체를 사랑하며 강요되는 세상의 힘과 불화한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유리 지바고의 시’장을 통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라고 의지를 보이면서도 ‘연극의 순서는 이미 짜여 있고,/길 끝은 피할 길 없’음을 탄식한다.(하권 17장 ‘햄릿’ 중)  


1965년 오마 샤리프(지바고 역), 줄리 크리스틴(라라 역)이 주연으로 열연하고 데이비드 린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 또한 세 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긴 러닝타임에 지칠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준비된 서곡과 인터미션은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상영회수가 곧 수익으로 환산되는 지금의 극장시스템에서 이러한 배려는 고색창연하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시종일관 집중력을 잃지 않는 감독의 연출과 화면 가득 펼쳐지는 러시아의 풍경(사실은 스페인과 핀란드, 캐나다 로케이션이다), 기라성 같은 명배우들의 열연은 197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대한 부담을 낮춘다. 모리스 자르의 음악은 영화의 정서적 기둥이 되어 한편의 대서사시를 완성하는데 기여하며, 러시아의 민속현악기인 발랄라이카의 주선율이 도드라지는 ‘라라의 테마’는 아직까지도 종종 소환되는 영화음악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라라의 남편이자 혁명가인 ‘스뜨렐리니꼬프’(빠샤)와 지바고의 마지막 대화 장면이 영화에서는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혁명의 완수를 위해 가혹한 이별을 견뎌야만 했던 스뜨렐리니꼬프는 지바고와 함께 라라를 기억한다. ‘그녀가 겪었던 온갖 부당한 처사를 몽땅 갚아주고, 그녀의 마음에서 저 불쾌한 기억들을 씻어내고, 그리하여 과거의 타락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게’ (하권 14장 17)하기 위해, 필생의 과업을 완성하고 싶었던 스뜨렐리니꼬프는 지바고의 말에 위안 받는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상적 인간의 구현이며, 당신만 한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으며, 당신은 비할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같은 장) 시대를 가르며 첨예하게 대립했던 계급투쟁은 라라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는 두 남자의 대화 안에서 부질없이 사라진다. 날선 세상에 대해 온화함을 잃지 않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붙잡았던 작가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게 표현된 대표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작품은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인텔리겐차의 인간적 고뇌를 묘사한다. 작가는 유리 지바고를 통해 시대를 삼켜버린 사상에 대한 의견을 토로한다. “마르크스주의가 객관적이라고요? 나는 마르크스주의만큼 자기 폐쇄적이고 그만큼 사실에서 유리되어 있는 사상은 없다고 봅니다. 누구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신화를 만들려고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일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치에는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진리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하권 8장 4) 인간적인 삶을 지향하며 개인의 존엄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여정은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소련 작가연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의 수상을 거절할 수밖에 없게 되고 작가 연맹에서의 제명과 시민권의 박탈이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고국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가 선택한 것은 가열찬 투쟁이 아니라 견뎌냄으로서 살아내는, 인민의 고난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소설의 단골소재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가 그 중에서도 단연 도드라지는 이유는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그만의 방법대로 관철한 작가의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결합시키고 가깝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행복이 가장 지배적으로 열광적이었던 순간에조차, 그들의 가장 숭고한 마음을 빼앗겼던 것, 즉 세계의 보편적 표상이라는 환희와 그들 자신이 모든 상황을 구성하고 있다는 감정, 그리고 모든 자연과 우주의 아름다움의 한 요소라는 느낌 등을 갖지 않은 적이 없었다. .... 거짓된 전제에 입각한 사회 제도와 정치적 이용은 그들에게 조악한 물건에 지나지 않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권 15장 15)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여인을 사랑했던 시인의 이야기는 삶을 향한 환희를 놓지 않았던 작가의 모습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친숙하지 않은 긴 러시아식 인명, 방대한 분량은 몰입에 대한 허들이 될 수 있지만 영화와 함께 소설을 접한다면 좀 더 부담 없이 <닥터 지바고>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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