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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30. 2020

'퀴닝'은 가능한가

서평 <인간의 조건> 한승태 (시대의 창, 2013)

체스에서 ‘졸’에 해당하는 ‘폰’은 한 번에 한 칸씩밖에 전진하지 못한다. 이 폰이 한 칸씩 전진해 상대편 진영의 끝에 다다르면 잡힌 말 중 어떤 말로도 변신할 수 있는 규칙이 있다. 이것을 ‘퀴닝(Queening)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가장 바닥 신분인 졸이 ‘여왕’이 되는 것이다.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라는 부제를 단 <인간의 조건>(한승태/시대의 창, 2013)의 서문에는 휴대폰 체스게임을 하던 저자가 게임 속 여왕이 된 폰을 부러워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 졸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 졸에서부터 나는 얼마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퀴닝할 수 있을까?’(p.10) 저자가 묘사한 ‘졸로서 살아남기’의 여정은 파란만장하다. 


저자 한승태는 대학 졸업 후 정말 하고 싶은 일이 글 쓰는 일임을 깨달아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썼다. 2007년에서 2011년에 걸쳐 그가 경험했던 노동의 기록은 1차 산업에서 3차 산업, 즉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종을 망라한다. 선원으로서 꽃게잡이 배를 탄 것으로 시작해 서울 서초의 주유소와 관악산 근처 편의점, 아산 돼지농장, 춘천 농가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 등에서 일한 경험을 책에 담았다. 식용 동물 농장에서 일한 경험담의 기록인 그의 두 번째 책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 창,2018)는 제 59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 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책에서 펼쳐지는 그의 경험담은 지난하다. 몸으로 일하는 노동의 가치는 언제나 최저임금 근처를 맴돌아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다.. 최저임금 3700원 시대에 3000원 시세를 주장하는 편의점 점장의 에피소드는 오히려 점잖은 축에 속한다. 회사나 고용주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매일같이 돼지 똥을 뒤집어쓰며 일하는 사람에게 한 달 마스크 세 개를 지급’(p.283)했고, 주변에 편의시설 하나 없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는 식사 시간 이후까지 일하는 사람에게만 식당에서 밥을 먹게 했다. 꽃게잡이 배의 선주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통발작업을 쉬지 않고 하루 20번이나 하게 하기도 한다. 


작가의 세밀한 묘사는 독자에게 마치 일터의 한복판에서 화자 자신이 되는 듯한 간접경험의 느낌을 준다. 각각의 작업현장에서 무엇을 먹는지, 생활하는 곳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버는지 등등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묘사는 21세기 대한민국 노동현장의 미시사(微視史) 그 자체다. 배에서 대소변을 해결하는 일에 대한 에피소드의 경우 그야말로 난감해서, ‘배에서 장을 비우고 나면 21세기를 사는 문명인의 자존심은 부도수표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p.30) 신산한 생활의 묘사는 독자에게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문장은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있다.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한 팍팍한 삶에 피폐해지는 정신세계조차도 저자는 가감 없이 지면에 담았다. 돼지농장의 몽골인 노동자들을 ‘비루한 특권 의식’으로 무례하게 대하거나 선의를 베푸는 손님에게 자신의 뒤틀린 심사를 내비치는 모습은 무자비한 비용절감의 절대 원칙과 고용인에 대한 멸시에 마모된 사람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우리의 처지가 리모컨 뒤에 끼워 넣는 건전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누군가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르는 건전지를 발명한다면 사람들은 그걸 두고 파견직이라고 부르게 될 거다.’(p.404)  


경제성장을 이룬 산업의 역군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기성세대는 해마다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의 나약함과 도전정신의 부족을 비난하기도 한다. 작가는 ‘젊은 사람들은 힘들고 돈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작업장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닌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p.389)이라며 청년들의 입장을 역설한다. ‘다수의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희망의 결핍이다’ (p.447)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과연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퀴닝이 가능한 사회일까?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p.437)’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경험했던 이들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체험에 기반을 둔 사실과 픽션이 가미된 내용으로 인해 소설처럼 느껴는 부분은 책의 장르적 특성을 모호하게 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치열하고 디테일한 작가의 경험담은 우리 사회의 단면임에 틀림없다. 좀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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