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오리 Nov 03. 2020

‘나’를 잃고 ‘나’를 찾기 위한 필드 가이드

서평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반비, 2018)

누구나 길을 잃은 경험은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나를 데리고 가던 누군가의 손을 놓쳤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떨구어 진 생경한 느낌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두려워지는 감각이다. 물리적인 길 잃음이 아니더라도 인생이라는 길에서 이탈된 듯한 느낌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를 두렵게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릴 때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인생의 고비고비를 지나며 지나게 되는 길들. 흔들림 없이 성장한다고 할 수 있을까? 리베카 솔닛은 에세이 <길 잃기 안내서>를 통해 오히려 길을 잃는 것의 필요함과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예술평론가, 문화비평가, 역사가, 환경·반핵·인권 운동가이기도 한 리베카 솔닛(1961~)은 자신의 경험담과 사색, 개인사, 역사적인 사실 등을 통해 길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펼쳐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길 잃은 유럽인이었던 카베사 데 바카의 일대기,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 화가 이브 클랭의 작품들에 대한 고찰 등 다양한 사실과 작가의 개인사 -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모, 아버지와의 에피소드는 사유를 통해 ‘지도’ 위의 표상이 된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중략)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p.43) 길을 잃었다 다시 돌아온, 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앞서 간 이들의 경험담으로 안내서 역할을 한다.  


다양한 소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푸름’이다. 공기 중에 산란하는 빛을 의미하는 푸른색은 공간, 떨어져 있음, 갈수 없는 곳의 색이라고 솔닛은 말한다. ‘세상의 어떤 것은 영영 잃어버린 상태일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멀리 있는 한 우리가 영영 잃지 않는다.’(p.68) 소유를 갈망하고 그를 통해 궁극적인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세태에 반해 푸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푸름에서 비롯된 시각적인 이미지는 푸르게 인쇄된 책의 활자와 더해져 공감각적 심상을 만든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혼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솔닛은 길 잃음을 권장함과 동시에 타인과의 연결성에도 눈을 돌리게 한다. 도움을 청하는 맹인 ‘터틀맨’의 이야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에 대한 은유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때, 이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덜 다급하고 덜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p.277) 나만이 존재하는 골방 같은 세계에 갇혀있기보다 타인을 긍정하고 손잡을 수 있는 관대함으로 세계를 확장한다면 길 잃음의 끝에는 ‘나’를 발견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솔닛의 에세이는 쉽지 않다. 개인사와 역사적 사실, 문화비평 등을 넘나드는 사유의 넓은 진폭은 때로 독자가 따라잡기에 버거울수도 있다.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이야기의 심장부에 도착하게 된다. 길을 잃은 것이 실패라고 느껴진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온 세상을 잃으라. 그 속에서 길을 잃으라. 그리하여 네 영혼을 찾으라“(p.32)  


작가의 이전글 고독과 연대, 글쓰기로 이루어진 타피스트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