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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Dec 09. 2020

걷기에 대한 역사이자 탐구, 의미, 가능성에 대한 총화

서평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반비, 2017)

‘글을 읽는 일은 저자라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의 말에 항상 동의하거나 그를 항상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이드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주리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P.122)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독자에게 ‘걷기’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 행위에 따른 가능성을 보여주며 지적인 여정을 이룬다. 예술비평가, 역사가, 환경운동가로서 솔닛의 면모가 오롯이 나타나는 이 책은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라는 부제에 걸맞게 걷기에 대한 깊고 넓은 고찰을 펼쳐낸다. 4부로 이루어진 본문은 걷기의 철학적 의미와 종교와의 결부, 문학에서의 보행, 도시 안에서의 걷기, 인간 문화적 측면에서의 걷기 등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반핵 활동가로서 네바다 핵실험장에 걸어 들어감으로 시작된 그의 사유는 소피스트, 루소, 키르케고르에 이르는 철학적 의미의 탐구를 거쳐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측면의 사실, 보행의 선구자들과 그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의 의미 등에 걸쳐 종횡무진 펼쳐진다. 


걷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많은 역사책들이 있긴 하지만 단순히 걷는다는 사실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사유를 이끌어 낸 책은 많지 않다. 걷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통찰은 씨실과 날실로 단단히 엮인다. ‘워즈워스는 보행을 쾌적함뿐 아니라 고통스러움에, 경치뿐 아니라 정치에 결부한 작가였다. 워즈워스가 걸은 곳은 정원을 벗어난 세상, 정제되거나 한정되지 않는 가능성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p. 193) 솔닛은 시인의 걷기가 그의 시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다양한 사실과 작품의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공간에 대한 작가의 고찰도 흥미롭다. 걷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무대가 필요하다. 솔닛은 뉴멕시코 치마요 성지순례에서 시에라네바다 산맥,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대로와 레드록스의 사막을 넘나들며 걷기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이것은 그의 글이 단순히 걷기에 대한 통사(通史)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확장되는 글쓰기가 된 원동력이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 비유를 구체화하는 행위, 몸과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구현함으로써 세상의 지형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힘든 길을 따라 어떤 먼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인간이란 넓은 세상 속에 홀로 있는 작은 존재, 그저 육체의 힘과 의지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한눈에 그려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p. 90) 개인적인 체험과 관찰의 서술은 읽는 독자에게 저자의 사유가 구체화되어 현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에게 이 책이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13장 ‘큰길의 시민들: 축제, 행진, 혁명’이다. 책머리에 실린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은 2016년의 촛불집회로 ‘공적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비무장 시민들의 엄청난 힘’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공적 공간에서 공적 존재가 되는 경험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내재된 힘을 느끼게 된다. ‘ 모든 퍼레이드, 모든 행진, 모든 축제는 고립과 싸워 이기는 일, 도시공간, 공적 공간, 공적 생활을 되찾는 일, 함께 걸을 기회를 누리는 일로 여겨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때의 걷기는 더 이상 목적지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 그 자체다.’ (p.371) 행동을 통해 연대하고 공간을 획득하는 과정은 그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육체적 활동으로서의 걷기의 의미가 보다 더 확장되어 세계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역사책이라고만 하기에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찰도 상당한 분량이다. 솔닛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해 걷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사실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위의 인용에서처럼 가이드로서의 솔닛은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교양으로서의 역사서를 찾는 독자라면 이 책이 기대하던 것과는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고 사유를 확장하는 방식에 대한 결과물로서의 책은 독자에게 또 다른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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